-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강봉문은 중병이 든 아버지를 낫게 해달라며 단을 쌓고 정성껏 하늘에 기원하였다. 그러나 끝내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죽과 나물만 먹고, 세수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았다. 강봉문의 효행에 감동한 호랑이가 밤이 되면 강봉문을 지켜주었다고 하며, 곡하던 자리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강봉문의 효행이 알려져 동몽교관(童...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봉두리에 있는 장흥위씨 재실. 위대경은 임진왜란 때 종제 수사공과 더불어 적진, 옥포, 웅치, 상주 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상주영장에 제수되었다. 상주영장으로 재직 중이던 위대경이 전사하자 부인 전주최씨는 아들 위효징(魏孝徵)을 데리고 난리를 피해 율촌면 봉두리로 옮겨왔다. 이후 위효징이 성장하여 김명운의 딸과 혼인하면서 장흥위씨 가문은 대...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횡간리에 있는 관우를 주향으로 모시는 조선 후기 사당. 관왕묘는 1730년(영조 6)에 세워졌다는 조사 보고서가 있으나 근거가 불확실하고,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원병과 관련해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 관왕(關王)[관우 또는 관운장]을 모시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관우의 초상화를 각자의 집에 마련해 제사를 모셨는데, 참여...
-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 때 해외로 갔던 동포들이 여수로 귀환하면서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일대에 만들어진 정착촌.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 등 외국에서 돌아온 동포들 중 오갈 데 없던 사람들이 판잣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귀환촌 또는 귀환정(歸還町)이라 하였다. 귀환촌은 일본을 비롯한 만주나 해외에서 많은 귀환동포들이 쏟아져 들어와 여수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구항 부두에 귀...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동도리 유촌에 있는 조선 후기 유학자 김류를 모신 사당. 귤은당은 1904년 귤은 김류(金瀏)[1814~1884]의 학식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제자인 박규석(朴圭錫)[1885~1923] 등이 건립하였다. 김류는 성리학의 대가인 기정진(奇正鎭)[1798~1879]을 사사하여 40여 년간 의심나는 부분을 질의하고 그것을 일일이 기록하였다. 귤은당은 부지 면...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열녀. 의령남씨(宜寧南氏)는 고기잡이와 나무하는 것을 업으로 하던 김대선(金大善)의 처이다. 시집간 지 4개월도 지나지 않아 남편과 함께 고기잡이를 나갔는데 태풍을 만나 배가 뒤집어졌다. 배에 탔던 사람들 가운데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들은 간신히 헤엄쳐 나왔다. 의령남씨도 떠있는 나무에 의지하여 겨우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 때 남편이 파도 속으로 휩...
-
조선 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문현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80세의 노모를 정성껏 모셨다. 노모가 노환으로 사경을 헤매자, 김문현이 하늘에 정성껏 기도하고 간호하니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노모가 쾌차하였다. 두 해에 걸쳐 흉년이 들자 김문현은 가난한 이웃들이 무사히 흉년을 넘길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김문현의 효행과 덕행이 알려져 후일 전남유림모성곡회(全南儒林募聖...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 출신의 효자. 김양록(金陽祿)은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의 후손이다. 여수시 삼산면의 거문도 서도에서 김진귀(金鎭龜)와 문화차씨(文化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0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양록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고, 이후 평생토록 아침저녁으로...
-
조선 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열녀. 김영아는 7세 때 아버지 김두화(金斗化)를 여의고 10세 때 어머니마저 집을 떠나자 남동생과 함께 삼촌댁에 의지하였다. 16세에 돌산읍 신복리 신기마을에 사는 신안주씨(新安朱氏) 주봉신(朱鳳信)과 혼인하였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을 얻었으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17세의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김영아에게 재혼을 권유하...
-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이자 농촌 지도자. 김유석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백야리 출신이다. 네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김유석의 어머니는 개가(改嫁)를 하지 않고 밤이면 베를 짜고 낮이면 품팔이나 해초를 뜯어 살림을 꾸려 나갔다. 김유석은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여 음식을 들지 아니하면 며칠이고 같이 굶었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유석은 춘궁기에...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일출(金日出)은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아버지와 함께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았다. 하루는 배가 태풍을 만나 돛대와 키가 모두 부러지고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해졌다. 이때 김일출이 아버지를 안고 하늘을 향해 기도하자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멈추고 배가 무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가 눈병이 나 보이지 않게 되자, 매일 식사 때마다 맛있는 것이...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정각(金廷珏)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다.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함께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였다. 이후 이장을 위한 묘 자리를 잡기위해 밤늦도록 산에서 기도하고 돌아오다가 어두워서 길을 잃게 되었다. 그 때 사슴이 나타나 그 뒤를 따라가 보니 어느 곳에 이르러 사슴이 발로 땅을 긁고...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지옥(金祉玉)은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양무공(襄武公) 김완(金完)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 대한 효행이 극진하여 김지옥의 어머니가 자신에 대한 효행보다는 친척들과 이웃에게 좀 더 신경을 쓸 것을 당부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했을 때 여러 날을 엎드려 곡을 하자 어머니의 병환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김지옥은 자신은 검약하고 남에게...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열녀. 문화차씨(文化車氏)는 시집간 지 3년 만에 남편 김진귀(金鎭龜)가 요절하였다. 이에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마음을 바꾸고 아들을 키우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아들이 장성하여 혼례를 치르고 손자를 얻자 문화차씨는 자신의 할 일은 다했다고 말하고 음식을 끊어 남편의 기일에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후에 문화차씨의 아들...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김찬기(金燦基)는 본관이 김해로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아버지가 병이 난 지 3년 만에 돌아가시려고 하자 김찬기는 자신의 넓적다리의 살을 잘라서 끓여 주었다. 아버지는 의식을 회복하고 어느 정도 차도를 보였지만 얼마 후 결국 별세하였다. 김찬기는 크게 슬퍼하며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이후 평생토록 매일같이 아버지의 묘소에...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국립 교육기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과거에는 나라에서 토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현대에는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시대 돌산은 순천부 행정구역에 속하여 방답진(防踏鎭)이 위치하고 있었는...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박중엽(朴重葉)은 60세가 넘은 아버지가 여러 달 병석에 누웠다가 끝내 숨을 거두자 급히 단지수혈하여 아버지를 소생시켰다. 또 왼쪽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열녀. 영광신씨(靈光申氏)는 박찬종(朴贊宗)의 처로 시집간 지 3년 만에 남편이 죽었다. 당시 영광신씨는 겨우 20세의 나이로 자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고, 상복을 입는 기간 동안 몸가짐을 엄숙히 하였다. 시아버지가 연로하여 항상 침상에 있었으나 언제나 시아버지의 침상을 따뜻하고 깨끗하게 유지하였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 내동마을 사충사 터에 세워진 비. 사충사(四忠祠)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종군하다가 전사한 정철(丁哲), 정린(丁麟), 정춘(丁春), 정대수(丁大水)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47년(헌종 13)에 건립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거되었다가 1921년 여수 웅천동에 오충사(五忠祠)란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이에 192...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사당. 일제강점기인 1926년 순종의 장례식 때 여수 지역 유림 대표 정충섭, 정영민, 최석주, 최봉삼 등 네 명이 중심이 되어 유림 50여 명을 규합하여 여수 유림 조선통곡단을 결단한다. 그들은 열차편으로 상경하려 했으나 일제 관헌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은밀히 야간에 선박을 이용하여 부산을 거쳐 순종의 장례식에 참가함...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삼황묘를 증축하면서 세운 비. 삼황묘는 여수 유림들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고종 태황제(高宗太皇帝), 순종 효황제(純宗孝皇帝)의 유덕을 숭모하고, 민족 정신을 고양하기 위하여 1927년에 세운 사우(祠宇)이다. 삼황묘비에는 삼황묘를 세우면서 모금한 내력이 적혀 있다. 비는 여수 충민사 입구 삼황묘 앞에 있다. 삼황묘비는 전체 높이가 2...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에 있는 사당. 서산사는 살아 있을 때 높은 학문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효행이 지극했던 만회 김양록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 김지옥, 인동부사 김정태, 거문도사립낙영학교를 세운 김상순 등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사당이다. 사당의 형태는 1900년에 세워졌다는 사우를 근거로 하였고, 1985년 11월 30일, 당시 여천군청과 삼산면 향토문화추진위원회, 주민...
-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에 있는 자연마을. 조선시대 순천부 선소가 위치했던 자연마을이다. 선소(船所)라는 문자의 의미는 배가 있는 곳 또는 배를 만들었거나 만드는 곳이란 의미이지만, 주로 수군진(水軍鎭)의 군선(軍船)이나 행정 관아의 배를 두는 곳을 선소라 표기했다. 여수시 시전동의 시목, 기전, 선소 3개의 자연마을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마을로 마을의 동편인 계곡을 따라 바닷가에...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선처흠(宣處欽)의 본관은 보성(寶城)이고 문충공(文忠公) 선윤지(宣允祉)의 후손이다. 선처흠의 아버지가 눈병이 있어 약을 써도 오랫동안 효험이 없었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흰 매의 눈알을 구해 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선처흠이 산에 올라 치성으로 기도하자 한 쌍의 흰 매가 날아와서 잡아 약으로 썼더니 아버지의 병환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선처흠...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열녀.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은 선처흠(宣處欽)의 처로 남편이 고질병으로 고생하자 넓적다리 살을 잘라 먹여 낫게 하였다. 선처흠의 임종 시에는 손가락을 베어서 나온 피를 먹여 며칠을 더 연명케 하였다고 한다. 경주김씨의 열행이 조정에 알려져 명정(命旌)이 내려졌고, 이에 정려가 건립되었다....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연도리에 있는 불을 밝혀 항해에 도움을 주는 시설. 소리도 등대는 밤에는 어두운 밤바다의 길을 열어주지만, 낮에는 가족 단위 나들이 장소로 알맞은 곳이다. 등대까지 가는 길은 삼림욕을 할 수 있으며, 등대 주변의 휴식 공간과 해안 침식 지형이 주는 아름다움이 트인 바다 위로 멀리 백도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남해 바다의 길잡이인 소리도등대는 1910년 10월...
-
1587년(선조 20) 손죽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와 전라좌수군이 벌인 전투. 1587년 1월 말경에 일본 규수의 오도(五島)와 평호도(平戶島) 출신들이 탄 왜선 두어 척이 흥양 녹도진[현재 고흥군 녹동] 앞바다를 침범했다. 보통 때 같으면 동남풍이 부는 4월 이후에 왜선이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예상을 깨고 일찍 침범했다. 녹도 만호 이대원이 경황이 없어 주장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 평촌에 있는 문화유씨 사우. 문화유씨 유용공(柳用恭)[1492~1511]과 유몽정(柳夢井)[1551~1589], 유렴(柳濂)을 배향하고 있다. 이전에는 유공신(柳公信)도 배향하였으나 중건하면서 빠졌다. 유용공은 호가 모강(茅崗)이며 세종 시기에 활동한 명신으로서 청백리였던 유관(柳寬)의 후손이다. 유용공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나부 모산촌(1985년...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금오도 심장리와 안도 안도리를 연결하는 다리 국내 최장 경간길이 200m로 가설된 복합 엑스트라 도즈드교(Extra-dosed교)인 금오도~안도간 연도교는 주탑의 높이는 46.2m이며 해수면에서 교량 상판까지는 27.1m의 통과 높이를 유지함으로서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고려해 형하고를 적용했다. 교량의 주탑과 상판을 연결하는 사재케이블은 모두 36개로 케이블...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에 있는 조선 중기 장군 이대원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 1637년(인조 15)에 세워졌다거나 1590년(선조 23), 또는 1597년(선조 30)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모두 전거(典據)가 불확실하다. 이대원 장군이 순직한 해(1587)에 「손죽도 이대원 장군께 드리는 글(弔詞)」을 쓴 한천 정협(鄭恊)의 문장을 통해 당시 사당이 세워졌음을 추...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말기의 국립 중등 교육 기관. 여수 지역은 순천부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향교의 역사가 짧았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897년 여수군(고종 34)이 생기면서 여수향교가 세워졌다. 여수향교는 1897년에 옛 좌수영 지역에 여수군이 설치되면서 창건되었다. 대성전에는 공자가 으뜸으로 모셔져 있으며, 안자(顔子)·...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 바닷가 일원에서 갯벌체험과 노을을 주제로 2008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축제. 여자만은 바다 가운데 여자도(汝自島)라는 섬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여수, 순천, 벌교, 보성을 포함한 큰 바다이다. 여자만에서 바라보는 환상적인 저녁 노을과 해안도로에 군데군데 위치한 카페촌, 점점이 떠있는 아름다운 섬들을 바라보면서 저물어가는 가을바다를 거닐며, 낭만을 느...
-
전라남도 여수시 경호동 관내의 대경도에 있는 자연마을. 구봉산에서 봉황 9마리 중 5마리가 현 오복마을 뒤 성산(成山)에 날아왔다고 하여 오봉(五鳳)이라 하였는데 약 70여년 전부터 오복(五福)으로 바뀌었다 한다. 본래 돌산군 경호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경도(大鯨島)·소경도(小鯨島)·가장도(加長島)·야도(冶島)를 병합하여 여수군 돌산면 경호리(鏡湖里)가 되...
-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장필규(張弼逵)는 본관이 인동(仁同)으로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장필규의 아버지 장사함(張思咸)과 함께 밤낮으로 빈소를 지켰다. 장사함이 곡을 하면 장필규(張弼逵)도 곡을 하였으며 장사함이 곡을 그치면 장필규도 역시 곡을 그치며 겨울부터 봄까지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장사함이 치통을 앓아 항상 침상에 있으면서 눈에 눈곱이 끼고 콧물이 흐르자...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충민사 입구에 있는 조선 중기에 건립된 하마비. 1603년(선조 36) 충민사(忠愍祠)가 이순신 사액사당 1호가 되었다. 궁궐이나 사찰 및 성균관, 사당 등 예를 갖추어야 하는 곳에는 하마비를 설치하였다. 하마비는 충민사에 올 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서부터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 경건하게 예를 갖추라는 의미로 세워진 비이다.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82...
-
조선 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효자. 본관은 창원(昌原). 호성공신(扈聖功臣) 효정공(孝貞公) 황진(黃璡)의 후손으로 황치연(黃致淵)과 김재택(金在澤)의 딸 김해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자창원황공유수기행비(孝子昌原黃公遺秀紀行碑)에 따르면 황유수(黃遺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과일, 채소와 같은 작은 것일지라도 밖에서 구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