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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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皇廟 |
영어의미역 | Samhwangmyo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909[충민사길 4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태균 |
성격 |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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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팔작지붕 |
건립시기/일시 | 1926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 1909[충민사길 40] |
소유자 | 삼황묘보존회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사당.
[개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순종의 장례식 때 여수 지역 유림 대표 정충섭, 정영민, 최석주, 최봉삼 등 네 명이 중심이 되어 유림 50여 명을 규합하여 여수 유림 조선통곡단을 결단한다. 그들은 열차편으로 상경하려 했으나 일제 관헌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은밀히 야간에 선박을 이용하여 부산을 거쳐 순종의 장례식에 참가함으로써 전국 유림으로부터 여수 유림의 충정을 높이 칭송받게 되었다.
여수 삼군자(三君子)라 칭송을 받던 정영민, 최석주, 최봉삼은 귀향 후 후배 유림들을 설득하여 이듬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고종 태황제(高宗太皇帝), 순종 효황제(純宗孝皇帝)를 모시는 삼황묘를 건립했다. 이때 삼황묘 창건사적비(三皇廟 創建事蹟碑)도 함께 세웠다.
[위치]
[변천]
삼황묘는 1927년 여수시 문수동 고락산 기슭에 세운 사우(祠宇)이다. 처음에는 삼황 이외에 면암 최익현, 의사 안중근을 배향하였으나, 외삼문에 새긴 태극 무늬가 문제가 되어 이를 그린 강진영은 일제 관헌을 피해 멀리 피신해 버렸다.
그 후 일제는 1939년 삼황묘(三皇廟)를 강제로 철묘시키고, 정명민, 최석주, 최봉삼 등을 잡아 가두기에 이른다. 광복 후 1947년 강진영, 최영모, 정기로가 중심이 되어 다시 삼황묘(三皇廟)를 복설하였다. 2006년 이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 최초 건립된 장소에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현황]
광복 후부터 삼황묘보존회가 발족되어 선인들의 충정 어린 제행을 매년 3월 12일에 계승하고 있다. 제(祭)는 삼황의 위패가 모셔진 제실에 푸른 관복을 입은 6~7명의 축관과 집사들이 먼저 들어가 위패를 열고, 초에 불을 붙이면서 시작된다.
이후 초헌관이 제실로 들어가 삼황에게 드릴 제사 준비가 제대로 되었는지 최종 확인을 하고, 제실에서 퇴실한 후 삼황에게 네 번의 절을 올린다. 절을 올린 초헌관이 다시 제실로 들어가 향에 불을 붙이고, 제관은 축문을 읽으며, 잔에 제주(祭酒)를 올리는 등 유림들은 조선조 종묘 제향 재현을 80년 이상 하고 있다. 한편 창건 당시의 사적을 기록한 삼황묘 창건사적비와 삼황묘 중수비(三皇廟 重修碑), 그리고 삼황묘 이전사적비(三皇廟 移轉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여수 지역 유림들이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군에 의해 수모와 치욕을 당하며 국부인 고종에 이어 순종까지 죽게 되자 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곳으로, 당시 유림들의 호국 충절에 대한 숭고한 뜻과 기개를 계승하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