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1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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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寺刹 |
영어의미역 | Temple |
이칭/별칭 | 절,사원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에 소재하는 불교 신행의 중심 공간인 사찰과 암자.
[개설]
창원의 불교 전통은 신라 시대에서 비롯하는 만큼 그 연원이 오래되었다. 역사적으로는 백월산의 남사, 봉림산의 봉림사가 유명하며, 주요 전통 사찰로는 성주사·의림사·성흥사·우곡사·불곡사 등이 있다. 오늘날에는 도심지에도 크고 작은 사찰들이 다수 분포하여 불교 신행의 중심 공간이 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창원 지역에 언제부터 불교가 전파되었는지를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성덕왕~경덕왕을 전후하여 백월산(白月山)을 중심으로 사암(寺庵)들이 널리 분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가운데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암으로 법적방(法積房)·회진암(懷眞庵)·유리광사(瑠璃光寺) 등이 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왕실의 후원으로 창건된 백월산 남사(南寺)가 있다.
백월산 남사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성도를 기려 세운 미륵전(彌勒殿)과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었으며 그에 따른 몇몇의 부속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폐사가 되어 그 흔적조차 확인하기가 어려우나 주변에는 아직도 ‘배사동(背寺洞)’ ‘반야동(般若洞)’ 등의 지명이 있어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신라 말 창원 지역의 사찰로, 역사적 의의가 뚜렷한 곳으로 봉림사(鳳林寺)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진경대사(眞鏡大師)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심희(審希)가 주석하여 많은 제자를 길렀으며, 고려 초기까지 봉림산문(鳳林山門)의 중심 사찰로 이름이 높았다. 사찰의 유지·운영에는 재지 세력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으며, 그 터는 발굴 조사를 통해 가람의 기본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신라 시대 창원 지역에는 다수의 사찰들이 분포하였으나 현재는 터만 확인될 뿐, 창건 사적을 간직한 성주사[곰절]·의림사·성흥사·우곡사·불곡사 등 몇몇 사찰만이 전통 사찰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김해와 창원을 경계 짓는 불모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성주사(聖住寺)는 웅신사(熊神寺)로도 기록되고 있으며 창원 지역에서는 흔히 ‘곰절’로 불린다.
성주사에는 신라 흥덕왕 때 빈번히 출몰하였던 왜구들을 물리친 무염(無染)의 신통력을 담은 연기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주사는 초창의 터에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재 성주사 삼층 석탑, 성주사 대웅전, 창원 성주사 관음보살 입상, 창원 성주사 감로왕도, 성주사 동종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문화재들은 대부분이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치고 있어 개창 이후 사세(寺勢)가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의림사는 진북면 인곡리 여항산(餘航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688년(신문왕 8) 위웅대사(爲雄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처음 절 이름은 삼국 통일 후 신문왕이 빈번한 왜구의 약탈 행위를 불법의 힘으로 물리치려는 원력으로 창건하였으므로 봉국사(奉國寺)라 이름했다고 한다. 사중에서는 봉덕사(奉德寺)라고도 했다고 전하며, 조선 초기까지는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로 선종(禪宗)에 속했다고 한다.
진해구 소재의 성흥사는 통일 신라 시대 무염(無染)이 창궐하는 왜구를 물리칠 것을 기원하며 창건된 사찰로 알려진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무염이 법력으로 왜구를 물리치자 흥덕왕은 토지와 노비를 사급(賜給)해 절의 창건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건립 당시에는 승려가 5백여 명이나 머물 정도로 큰 규모였다고 하며, 이후 수차례의 화재[1109년, 1668년]로 이전을 거듭하다가 1789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동읍 단계리 우곡사는 전단산(旃檀山) 동쪽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역시 신라 흥덕왕 때 무염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의 절은 그 터에 중창되어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최근 확인된 일제 강점기에 중창된 대방전 건물의 상량문에 따르면 김해·창원 등 각지의 불자들이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곡사 또한 창건 이후 고려와 조선, 그리고 근현대로 오면서 사세가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불곡사는 통일 신라기 비로자나불 좌상(毘盧舍那佛坐像)을 주불로 봉안하였던 절터에 중창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음산에 위치하는데, 비음산은 봉림산~전단산과 연결되며 불모산과도 멀지 않다. 1930년 우담(雨潭) 화상이 비로자나불 좌상을 수습해 현재의 사찰을 일구었다. 현재 비로자나불 좌상은 비로전(毘盧殿)을 지어 안치하였는데 창원 불곡사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보물 제436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중창 과정에서 과거 창원부 객사의 삼문을 옮겨 와 일주문[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33호]으로 삼고 있다.
이밖에도 흩어져 있는 여러 사찰의 유물들은 창원 지역의 불교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외동의 용화전 석조 여래 좌상[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43호], 삼정자동 마애불[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98호]을 비롯하여 많은 폐탑과 불상 등은 화려했던 창원 불교의 전통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사찰]
일제 강점기는 이른바 ‘왜색(倭色)’ 불교의 유입으로 한국 전통의 불교 신앙에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의 침탈에 대항하면서 전통 불교의 맥을 잇고자 하는 노력들이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일어나 많은 사암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1912년 통도사 마산 포교당으로 출발한 추산동의 정법사는 일제의 조선 침탈에 동반하여 유입된 왜색 불교에 대응하고 도심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펴기 위해 창건되었다. 이후 경봉선사(鏡峰禪師) 등 많은 고승대덕이 주석하여 조선 독립을 위한 투쟁 정신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1929년 통도사의 창원 포교당으로 창건된 구룡사는 일제의 조선 침탈에 동반해서 유입된 일본 불교에 맞서 조선 불교의 맥을 잇고, 새 시대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은 물론 사회 교육, 구호 사업의 일환으로 창건되었다.
1912년 창건의 원각사(圓覺寺)는 태고종의 수계사찰(授戒寺刹)로서 지역 사회의 불교 홍포를 위해 크게 활약했던 한국 불교 태고종 승정(僧正) 철화당(鐵華堂) 경호(鏡湖) 대종사가 40여 년간 주석하다 입적한 사찰로도 유명한데, 이곳에서는 태고종의 많은 교임(敎任)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에는 재가 불자들에 의해 다수의 사찰이 창건되었다. 완월암[완월동], 영천암[진동면], 성덕암[추산동], 동읍의 성덕사[노연리]와 구룡사[용강리], 대산면의 용정사[가술리]와 극락암[북부리], 북면의 백룡사[신촌리]와 달천암[외감리], 그리고 월곡암[월촌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사찰들은 비록 개인의 수행처 혹은 개인 이름으로 창건되었지만, 대부분 주변 지역 불자들의 신심과 물질적 공양이 뒷받침되어 운영되었다.
[도시화 속의 변모와 활동]
창원 지역은 1970년대를 지나면서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져 인구 증가와 함께 사찰의 수도 적지 않게 늘어나고 있다. 이들을 종파별로 보면 대한 불교 조계종, 대한 불교 태고종, 대한 불교 천태종, 대한 불교 법화종 등 여러 종단들로 이루어져 있고, 신도는 적게는 수 십 명에서 많게는 수 천 명에 이르고 있다.
통도사 창원 포교당으로 창건된 구룡사는 1973년 부산-마산 간 고속 국도 확장 공사로 인해 사찰 부지가 도로에 편입됨에 따라 현 위치인 소답동 909번지로 옮기게 되었으며, 그 후 창원시가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로 행정과 공업의 중심 도시로 변모하면서 포교당의 사회적 기능과 위치의 중요성이 높아지자 그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불지사는 1990년 쌍계사의 창원 포교원으로 개창되었다. 1991년 창원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불교 교양 대학인 신행 학당을 운영하여 3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2002년에는 조계종 포교원에서 처음 시행하는 전문 교육 기관 불지수다라 대학(佛智修多羅大學)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1993년 선재 장학회를 설립하여 운영 중에 있다.
길상사는 약 60여 년 전 김봉순이란 불자에 의해 용연사(龍淵寺)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승보 종찰인 송광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현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창원 포교당으로 지역 사회의 포교와 불자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신도들의 조직으로 거사림회를 비롯하여 불일회, 연등회, 반야회 등의 단체가 있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원흥사는 1980년 창원시 토월동에서 개창되었으며, 1989년 상남동으로 이전하였고, 현재 창원시 도계동 912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애국 불교, 생활 불교, 대중 불교의 3대 지표를 표방하고 있으며, 종합 불교 회관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특징]
창원은 대외적으로 열려 있어 일찍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타 지역보다 먼저 사찰들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추정의 단계이지만, 이 지역의 불교 전통은 가야의 역사와도 연결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선불교가 유행하여 하나의 산문을 이루었던 곳도 이 곳이었다. 이후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사세가 주춤하다가 근현대에 들어 다시 불교 문화가 융성해지고 있고, 사찰들의 사회적 활동 또한 활발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