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339 |
---|---|
한자 | 鳳林山門 |
영어의미역 | Bongrimsan Mountain Schoo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신라 하대에 경상남도 창원의 봉림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구산선문의 하나.
[개설]
봉림사(鳳林寺)는 신라 하대에 오늘날 창원·김해 지역의 중심 사찰이었다. 개산조(開山祖)로 추증된 인물은 현욱(玄昱)이고, 중심 승려는 심희(審希)이다. 봉림사가 있던 자리에는 1919년 조선총독부가 주요 유물들을 강제로 옮겨간 표석이 남아 있다. 현장을 떠난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관리하고 있는데, 신라 말 창원의 역사와 문화를 들려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선종의 아홉 산문]
선종은 경전과 이론을 중요시 하는 교종과 달리 ‘불립문자(不立文字)·견성오도(見性悟道)’를 표방하면서 스스로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행으로, 신라 말 6두품 지식인과 지방 호족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선종의 대표적인 사찰을 일컬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한다.
구산선문은 대개 영향력이 있는 고승과 그가 머무는 사찰을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가지산문은 장흥의 보림사(寶林寺)를, 실상산문은 남원의 실상사(實相寺)를, 동리산문은 곡성의 태안사(泰安寺)를, 사자산문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를, 사굴산문은 강릉의 굴산사(堀山寺)를, 성주산문은 보령의 성주사(聖住寺)를, 희양산문은 문경의 봉암사(鳳巖寺)를, 수미산문은 해주의 광조사(廣照寺)를 중심사원으로 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한 봉림산문은 창원의 봉림사가 그 중심이었다.
[중심 인물과 후원자들]
원감(圓鑒) 현욱은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선승으로서는 가장 먼저 국사(國師)에 봉해진 인물로, 봉림산문의 개산조로 추증되고 있다. 심희는 김해 지역에서 태어나 9세에 현욱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인물이다. 그는 10년 만인 868년(경문왕 8) 스승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았다. 심희는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전국을 두루 돌면서 수행과 교화 활동을 펼쳤는데, 찬유(璨幽)와 같은 제자승(弟子僧)을 대동한 가운데 돌아본 곳으로는 광주·설악·명주 등 당시 반신라(反新羅)의 정서가 팽배한 곳이 많았다.
심희가 창원 지역에 머물게 된 것은 20여 년 동안의 순례 행을 마친 이후의 일인데, 출신지인 김해와 가깝고 무엇보다 ‘복림(福林)’이라 불릴 만큼 길지(吉地)가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많은 제자를 길러 산문을 발전시켰다.
봉림사는 창원 지역과 김해 지역의 후원자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다.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과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가 대표적 인물이다. 심희가 봉림사에 주석하는 동안 신라 왕실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효공왕(孝恭王)과 경명왕(景明王)에 이르는 시기에는 그 정도가 더 하였다. 따라서 신라 왕실에서도 크게 후원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산문의 중심 터]
산문의 중심지인 봉림사는 현재 창원시 봉곡동 봉림산 자락에 그 터가 있다. 1995~1998년 4차례에 걸쳐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금당(金堂) 터와 탑 자리를 찾아냈는데, 사역의 중심부에서 타원형 못과 수미산(須彌山)으로 여겨지는 조산 등을 확인하는 등 일부 가람의 구조를 알 수 있는 성과를 얻었다. 건물지에서는 ‘봉림사(鳳林寺)’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들도 다수 수습되었다.
그 외 중요 유물로는 진경대사 보월능공탑과 탑비, 봉림사지 삼층석탑 등이 있다.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심희의 사리를 봉안한 석조 기념물로, 형태는 통일신라 양식의 팔각원당형이다. 탑비는 심희의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양식으로 일제강점기에 밀반출된 것을 되찾아와 복원한 것이다.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봉곡동 상북초등학교 정문 오른쪽 화단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