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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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지역 역사.
[개설]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옛 이름은 굴자(屈自), 의안(義安), 의창(義昌), 골포(骨浦), 환주(還州) 등이다. 지금의 창원(昌原)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은 1408년(태종 8) 때의 일이다. 통합 전의 창원 지역에 해당하는 의창현(義昌縣)과 마산 지역에 해당하는 회원현(會原縣)을 합하여 창원부(昌原府)라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창원이라는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고 시기마다 그 지명도 달랐다.
지금의 창원시는 2010년 7월 1일 옛 창원시·마산시·진해시가 통합되어 만들어진 도시다. 통합 이전의 마산시와 진해시는 근대 이후 성장한 도시이다. 이에 반해 창원시는 조선 시대 창원 도호부가 있었던 곳으로, 1974년 호주 도시 캔버라를 모델로 한 계획도시로 탄생하였다. 국내 최장의 직선 도로인 창원대로의 남쪽에는 산업 단지, 북쪽에는 주거 단지로 분리된 도시 구조를 갖추고 있다. 1970년대 국가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도시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83년 경상남도 도청이 이전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경남의 정치, 행정, 산업, 문화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였다.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구석기 시대의 유적은 조사되지 않았지만 낙동강 가까이 있는 창원시 의창구 동읍 합산 패총에서 신석기 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빗살무늬 토기편이 조사되어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5,000~6,000년 전부터 창원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원 지역과 낙동강을 경계로 그 주변에 위치해 있는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조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낙동강 변의 창원 지역에서도 신석기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크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아 이 지역에 인간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이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은 정치권력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중요 유적으로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진동 유적, 성산 패총 최하층의 마을 유적, 남산 청동기 시대 환호취락 유적, 상남동 일대의 고인돌 군, 동읍 덕천리를 중심으로 한 용잠리와 봉산리 일대 고인돌 군이 대표적이다.
[고대]
삼국 시대 경남 창원 지역에는 가야에 속하는 정치 집단이 있었다. 포상 팔국(浦上八國) 중의 하나인 골포국(骨浦國)과 탁순국(卓淳國)이 그것이다. 해상 왕국이었던 골포국은 『삼국유사』에 합포로 비정되고 있지만 유적과 유물의 분포로 보아 마산만에 인접해 있는 성산 패총 일대의 창원시 성산구 일대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 이후부터 가야 시기까지의 유적이 고루 분포하고 있는데, 가음정동 유적[고인돌·청동기 시대 주거지·패총·고분군·수전지], 성산 패총, 내동 패총, 삼동동 고분군, 외동 패총 등이 해당된다.
다호리 유적이 있는 의창구 동읍 일대도 정치 집단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정치 집단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동읍의 다호리 유적에서는 수준 높은 유적과 유물이 조사되었다. 특히 낙랑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오수전(五銖錢)이나 중국제 거울 등의 유물은 이 지역에 정치 집단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변한의 12국 중 하나인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창원 지역에 있었던 골포국은 4세기를 지나면서 탁순국으로 바뀌었다. 『일본 서기』에 의하면 4세기 대에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가야에는 13개의 나라가 있었다. 그 중의 탁순국은 창원 지역에 자리 잡은 나라였다. 탁순국의 성장과 발전을 보여 주는 유적은 고분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도계동 고분군·가음정동 유적·삼동동 옹관묘 유적·반계동 유적·천선동 고분군·창곡동 유적 등이 해당된다.
탁순국은 신라와 백제의 가야국 침략 과정에서 가야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김해의 가락국이 신라에 멸망됨으로써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6세기 중반 무렵 신라에 스스로 항복하였다. 창원의 탁순국은 신라에 복속된 후 신라의 굴자군이 되었다. 이후 신라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소속된 지역은 칠제현(漆隄縣)[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합포현(合浦縣)[창원시 마산], 웅신현(熊神縣)[창원시 진해구 성내동]이었다.
[고려]
고려 초 창원 지역은 김해에 소속되었다가, 충렬왕 대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면서 고려에서 군량 등을 공급한 공로가 있었다고 하여 의안을 의창(義昌)으로 바꾸고 현(縣)으로 승격시켰다.
고려 시대의 마산 지역은 원나라 주도의 일본 정벌이 시작되면서 전진 기지가 되었다. 특히 합포는 일본 정벌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포구가 길고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태풍의 영향을 덜 받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찍부터 진(鎭)이 설치되어 있었고, 일본과의 직선거리도 짧았기 때문에 출발 기지로 활용하기 좋았다. 조류를 감안할 때, 합포에서 출발하여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 그리고 일본 본토로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게다가 합포에는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조창이 있어서 인근 지역이 조세가 이곳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군량 확보가 유리하였다.
[조선]
창원이란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 조선 시대이다. 조선 태종 대[1408년]에 의창(義昌)과 회원(會原)을 합쳐 창원(昌原)이라 이름 지었다. 부(府)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창원부가 되면서 합포에 우도 병마절도사영(右道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1601년(선조 34)에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 시대 진해 지역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제포는 조선 초기 1407년(태종 7) 일본과의 교류가 허용된 최초의 개항지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웅천 왜성, 명동 왜성, 안골 왜성 등에 일본 군대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1603년(선조 36) 이곳에 있던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영이 진주로 이전되었다. 칠원군과 합쳤다가 1617년(광해군 9)에 나뉘고, 1627년(인조 5)에 진해와 합쳤다가 1629년에 분리됐다. 1895년(고종 32) 23부제가 실시되면서 진주부 창원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경상남도 창원군으로 개편되었다. 1899년 마산포가 개항되었고, 창원 감리서(昌原監理署)가 개설되어 군수가 감리를 서리하였다.
1906년 진양군 양전면을 편입하여 창원부로 승격하였다. 1908년 웅천군, 진해군과 김해군 대산면, 칠원군 구산면이 편입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중 일본이 군용 철도로 마산선[마산~삼랑진]을 부설하였고, 1926년 진해선[진해~창원]을 개통하였다.
[일제 강점기]
창원 지역은 제국주의 일본이 일찍부터 진출하였던 곳이다. 1899년 마산 지역이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항되었고, 진해만 일대는 러일전쟁 시기에 일본 연합 함대가 군사 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특히 진해 지역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건설한 계획도시로서 군항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 창원부를 마산부로 고치고 마산부청을 설치했으며, 마산부 이외의 지역을 창원군으로 고쳤다. 1910년 이래 일본은 웅천군과 거제군 일부 지역에 그들의 군항을 설치할 목적으로 도시 계획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 후 규모를 축소하여 1916년 지금의 진해시에 해군 요항부(海軍要港府)를 설치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창원군으로 개칭되고 외내면은 마산부에 편입하였다. 1931년에는 진해면이 진해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55년 시로 승격됨으로써 창원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현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부산·경남 지역은 일본·중국 등지로부터 고국에 돌아오는 귀국선을 맞이하는 감격과 눈물의 땅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엄청난 귀환 동포의 갑작스런 유입으로 인해 실업자의 양산과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사회 경제적 문제 역시 타지방에 비해 심각하였다.
하지만 창원 지역은 1960년대 이후 산업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마산 지역에는 한일 합섬, 수출 자유 지역 등과 같은 산업 시설이 들어섰다. 창원이 본격적인 산업 도시로 변화된 것은 1974년 창원에 기계 공업 단지가 건설되면서부터이다. 이 때문에 창원 지역은 한국 노동 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창원 지역은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 공업 정책에 따라 1974년 창원군 일대의 넓은 분지가 창원 기계 공업 단지로 개발되면서 새로운 ‘창원시’가 형성되었다. 1976년 창원시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0년 4월 1일 창원시로 정식 승격되었으며, 1983년 7월 1일에는 경상남도 도청이 이전하였다. 1995년 도농 통합형의 창원시와 마산시가 각각 출범하였고, 2010년 7월 1일 마산시·창원시·진해시가 통합하여 지금의 창원시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