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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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尙右兵營 |
이칭/별칭 |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정의]
조선 시대 창원 지역에 설치된, 경상우도의 병무를 관할하던 병마절도사영.
[개설]
조선 시대에는 각 도(道)의 군사적인 지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병사(兵使)로 약칭되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두었다. 병사는 종2품 서반(西班) 관직으로 경상도에는 경상 좌도와 경상 우도에 각 1인씩 배정되었다. 병사는 도의 국방 책임을 맡아 유사시 군사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병사가 거처하면서 업무를 지휘하는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즉 병영(兵營)에는 우후(虞候)와 구전 군관(口傳軍官) 등의 품관(品官)과 진무(鎭撫)·병영리(兵營吏)·공장(工匠)·노비 등이 배속되었고, 특히 함경북도 병사 밑에는 평사(評事)가 계속 배속되었다.
병사는 평시에 본인이 직접 또는 우후나 평사 등을 통해 도내를 순회하면서 지방군의 훈련, 무기 제작과 정비, 군사들의 군장, 군사 시설 수축 등을 살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도적·호환(虎患) 등이 발생한 유사시에는 유방(留防)하는 정병 등의 지방 군사력을 동원, 지휘하여 대처해야 하였다. 또한 임기응변으로 군사 조치를 취하고 나서 중앙에 보고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를 위해 병사가 도내의 정병은 물론 하번인 수군·경군사까지 파악하고, 진장(鎭將)·수령 등의 군사 업무 포폄(褒貶) 및 군사적 범법 행위에 대한 형(刑)을 적용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1895년(고종 32) 도제(道制)가 폐지되면서 병마절도사 또한 폐지되었다.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 즉 경상 우병영(慶尙右兵營)이 있던 합포영은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붕괴되면서 병영을 둘만한 자리가 못되기 때문에 이전하자는 의견이 임진왜란 직후부터 제기되었다. 결국 그 대상지로 형세가 험하다고 평가되는 진주의 촉석성이 적임지로 거론되면서 마침내 1602년(선조 35) 진주 이전이 결정되었다. 진주성에 설치된 우병영은 철저히 군사적인 구조로 배치되어 유사시를 대비하고자 하였다. 당시 우병사였던 이빈의 장계와 1603년(선조 36) 체찰사 이덕형의 계청에 의해 우병영의 진주 이전이 결정되었다.
한편 경상도에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는 주진인 경상도 우수영은 제포진[내이포]에 처음으로 창설되었다가 창원의 합포로, 다시 거제로 옮겨 설치하였다가 1604년(선조 37) 고성[지금의 통영]으로 옮겼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각도의 수영은 모두 해체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에는 경상도에 3명의 병마절도사[병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관찰사가 겸임하였다. 그리고 낙동강을 기준삼아 경상도를 동서로 나눈 군사 구역으로서 좌도와 우도를 설정해 좌병사의 병영은 울산에 두고 우병사의 병영은 창원의 합포[지금의 마산]에 두었다.
[관련 기록]
『신증 동국 여지 승람』에는 조선 태종 때 창원에 설치된 경상 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영(兵馬節度營)을 1603년에 촉석성[진주성]으로 옮겼는데 앞에는 남강이 있어 그곳을 우병영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용]
1408년(태종 8) 7월에 처음으로 의창현과 회원현을 합하여 창원부(昌原府)로 하였다. 그리고 종5품의 판관(判官)을 파견하고 경상 우병영(慶尙右兵營)을 설치하였다. 창원 도호부 내에 우병영성(右兵營城)이 있었다. 이 성은 합포진(合浦鎭)이 있었던 곳에 위치하였고 석성(石城)으로 높이 약 4.5m[15척], 둘레 약 1,300m[4,291척]의 규모이다.
[변천]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영, 즉 경상 우병영은 본래 창원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1603년(선조 36)에 진주로 옮겼다.
경상 우병영이 진주로 이전된 후 우병마절도사[무관 종2품]로 하여금 진주목의 목사[문관 정3품]를 겸임하게 함으로써 진주 목사를 따로 발령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우병사를 도와 진주 고을의 일을 전담할 판관[종5품]을 두기로 하였다. 이 때 부터 우병사를 ‘진주 병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문명의 고장’인 진주에 무관이 와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1635년(인조 13)에 병사가 목사를 겸하는 조치를 폐지하고 다시 목사를 파견해 우병영과 진주목의 업무를 분리하였다. 그 후 우병영은 그대로 진주성 내에 위치하면서 경상 우도의 병무 중심지와 영남 서부의 방어 기지로서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립된 김홍집 내각에 의해 1894년 7월 15일 각도의 병영 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경상 우병영의 모습은 영조 때 완성된 『여지 도서(輿地圖書)』에 잘 나와 있는데 당시 진주성 내의 여러 시설물들을 볼 수가 있어 내외성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