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049
한자 古代尖端文物-展示場-昌原茶戶里遺蹟
영어의미역 Sites of Daho-ri in Changwon are Exhibition Halls of Ancient Times Spearhead Civiliz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다호리지도보기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집필자 김형곤

[개설]

다호리 유적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다호리 232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다호마을 뒤쪽으로 높이 약 50m 정도의 구릉에서부터 높이 약 10m인 얕은 계단식 논밭에 이르기까지 원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조영된 무덤들이 밀도 높게 분포하고 있다. 유적의 동북쪽은 동판저수지, 북쪽으로 약 1㎞ 지점에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다. 북쪽으로 약 10㎞에 위치한 낙동강 제방이 쌓여지기 전에는 대부분 갈대숲을 이루고 있었고 수상 교통에 매우 유리한 입지 조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8년 초부터 연차적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1998년 2월까지 총 8차에 걸쳐 조사가 실시되었다. 원삼국기(변한 또는 가야 초기)에 해당하는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 69기와 옹관묘 4기 및 가야 시기에 해당하는 대형 수혈식 석곽 봉토분 1기가 조사되었다. 다호리 유적의 중요성은 항상 수분을 유지하는 저습지에 형성되어 목제 유물을 포함한 다양한 유물의 잔존상이 양호하다는데 있다. 또한 철광석의 존재로 본 철 제련 기술의 소유, 외국과의 교역을 보여주는 국제 유물 등은 다호리 집단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갈대 속에 묻힌 나라를 찾아서]

창원시 동읍에 있는 다호리는 완만한 구릉성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농촌 마을이다. 동쪽에는 동판저수지가 위치하며 자연마을로는 다호마을·딱재마을 등이 있다. 다호마을은 다호못이 마을 중앙에 있어 붙여지게 된 지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높이 432.1m의 구룡산 북서 줄기와 이어지는 높이 20m 정도의 야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야트막한 구릉이다.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논밭 일대는 현재 감나무 과수원과 계단식 논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약 1㎞를 가면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으며, 북쪽으로 약 10㎞를 가면 본포나루가 나온다.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면 김해가 나오고, 해로를 이용하면 먼 거리와의 교통이 용이한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

유적과 인접하여서는 성지(城址)와 고분군(古墳群)이 자리하고 있다. 성지로는 동면 무성리 성지북면 화천리 성지가 있다. 무성리 성지는 산 정상부에 위치한 토성(석성도 포함)으로 폭이 50m, 남북 길이가 100m 정도이다. 화천리 성지는 대천리 고분군이 입지해 있는 능선의 정상부로 150m 가량의 둘레가 확인되고 있다. 고분군으로는 동면의 봉곡리 고분군, 북면화천리 고분군동전리 고분군 등이 확인되고 있다.

창원 다호리 고분군의 주인공들은 이들 주변 유적들과 함께 어떤 나라를 이루었던 것일까? 이를 기록을 통하여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입지 조건과 유물 등을 통하여 접근해 볼 수는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변한과 진한의 소국 안에 여러 별읍(別邑)이 있었고 그 우두머리를 거수(巨帥)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가운데 세력이 큰 사람을 신지(臣智), 그 다음으로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나라들은 큰 경우 4,000~5,000가(家), 작은 경우는 600~700가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니, 다호리의 정치체는 그 가운데 적은 규모로 보면 대략 1가 5인을 기준으로 약 3,000인에 이르는 규모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들 세력은 외곽 지역을 지배하면서 정치체의 중심부를 이루었을 것이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다호리 유적 발굴 진행표

[다호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크게 철기류, 칠기류, 토기류로 나눌 수 있다. 많은 양이 출토되었고 종류 면에서도 매우 다양하다. 무기류로는 철검(鐵劍), 쇠투겁창[鐵矛], 쇠꺾창[鐵戈], 쇠화살촉[鐵鏃] 등이 있다. 철검의 경우 검파(劍把)나 검파두식(劍把頭飾)은 청동으로 제작되어 세형동검문화 단계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검신(劍身)이 철로 바뀌고 단조품(鍛造品)이기 때문에 등대·혈구(血溝) 등이 보이지 않는다.

쇠꺾창의 경우도 단조품이라 등대와 혈구가 없을 뿐 동꺾창과 동일한 형태이다. 쇠투겁창의 경우는 형태에 있어 북부 지역의 용연동 및 상리 유적 출토품과 통하고 있어 중국식 동모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쇠화살촉은 무경역자식(無莖逆刺式)으로 그 동안 조양동·노포동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공구류는 쇠도끼가 중심을 이루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다. 주조(鑄造)의 공부[斧]는 공부[部]의 단면이 제형(梯形)을 이루고 세신을 가진 것, 단조(段造)의 판상쇠도끼[板狀鐵斧], 방주상쇠도끼[方柱狀鐵斧], 그리고 쇠판을 말아 붙여 공부를 형성하고 어깨를 가진 유견쇠도끼[有肩鐵斧] 등 있다. 이러한 쇠도끼들은 형태적으로 모두 독특한 것으로 중국의 쇠도끼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나무로 된 자루가 부착된 쇠도끼들을 보면, 자루를 끼워 넣은 방법이 오늘날의 도끼와 같은 형태, 자귀와 같은 형태 등이 있다. 도끼와 같은 형태는 나무를 베거나 무기로 사용하였다고 생각되며, 자귀와 같은 형태는 깎거나 다듬는 공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판상쇠도끼는 도끼와 같이 사용하기도 하고 ‘ㄱ’자형의 자루에 묶어 자귀와 같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농기구로는 따비와 낫이 있다. 따비는 2종류가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폭이 좁고 길며 단면이 삼각형을 이룬 것이며, 다른 하나는 폭이 좀 더 넓고 짧은 것이다. 따비는 오늘날의 따비와는 형태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앞부분 끝[先端部]의 휘어진 각도로 보아 따비로 보인다. 낫은 오늘날의 낫과 형태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칠기류는 많은 양이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해 이 시기의 칠문화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각종 용기류(容器類)를 비롯해 무구류(武具類), 공구류(工具類), 농공구류(農工具類), 그리고 붓, 판자(板子)에 이르기까지 일반화되어 있다. 칠은 거의 모두가 흑칠(黑漆)인데 주칠(朱漆)도 보인다. 칠기 중 용기류의 기형은 남부 지방의 후기 무문토기 기형과 유사한 것이 많다. 칠기는 그 동안 세형동검문화기의 서흥 천곡리, 아산 남성리, 함평 초포리 유적 등에서 발견된 바 있어, 적어도 세형동검문화기부터는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토기류는 무문토기(無文土器)와 와질토기(瓦質土器)가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분묘에서 무문토기와 와질토기가 공반되고 있어 이 유적 출토 무문토기와 와질토기는 큰 시차 없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무문토기의 기형에는 독모양토기[甕形土器],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두형토기(豆形土器), 토기뚜껑, 주머니호가 있다. 와질토기는 쇠뿔손잡이항아리[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와 주머니호가 대표적인 기형이다.

한편 다호리에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원통형의 칠기 화살통도 출토되었다. 화살통은 흙에 눌려 납작한 채로 발견되었으며 상태가 불량하여 칠피(漆皮)만 남아 있으나 형태를 복원할 수 있었다. 동검의 칠초와 같이 표면에 문양이 없고 흑칠에 돌대(突帶)가 돌려진 것으로 보아 이 시기 한국의 특징적인 유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돌대로 보아 목태(木胎)로 추정되며, 길이가 90㎝ 정도로 긴 것으로 보아 이 화살통과 세트를 이루는 활은 장궁(長弓)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원통형 화살통은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로 후한(後漢) 기남화상석(沂南畵像石)에는 활을 집어넣은 원통형 같이 좁고 긴 형태의 화살통이 표현되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이밖에 회문(回文)과 같은 새로운 칠기 문양이 확인되었고 철제 낚싯바늘도 출토되었다. 그동안 칠기 문양은 주칠의 단순한 선문 또는 삼각거치문 정도가 알려졌으나, 5·6차 조사에서와 같이 문양만 돋보이게 하여 흑칠로 처리한 것도 확인되어 당시 칠공예(漆工藝)의 수준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철제 낚싯바늘의 부장은 다호리 주민이 낚시 어업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쇠망치가 출토된 제17호분의 피장자가 대장장이와 같은 철기 제작에 종사하였던 인물이라고 할 때, 낚싯바늘이 출토된 분묘의 피장자는 어업에 관계된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첨단문물의 전시장, 다호리 유적의 의미]

제1호분에서는 각종 청동기, 철기, 칠기 등 수많은 부장품이 통나무널과 함께 완벽한 형태로 출토되어 주목되는데, 특히 부장품 중에는 다섯 자루의 붓이 포함되어 있어 원삼국 초기 대외 교역의 서사용구(書寫用具)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3·4차 조사에서는 널무덤 15기가 조사되었는데 1·2차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들과 유사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새롭게 확인된 것을 살펴보면 단야공구(段冶工具)의 하나인 쇠망치[鐵鎚]가 출토되었다. 이 쇠망치의 확인으로 많은 단조쇠도끼[鍛造鐵斧]가 이 지역에서 직접 제작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쇠망치는 쇠집게, 모루 등과 함께 세트를 이루는 단야구로 평양 정백동 62호묘에서도 쇠집게와 함께 출토된 바 있다.

철제 고사리형 장식부철기(裝飾附鐵器)도 출토되었다. 그동안 알려진 철제 고사리형 장식이 있는 철기로는 경주 조양동 목곽묘에서 출토된 ‘S’자형 말재갈멈추개와 경주 구정동 목곽묘 출토의 철모, 가야 고분 등에서 출토되는 미늘쇠[有刺利器]와 판갑옷[板甲] 등이 있는데 모두 철기시대 후기 이래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런 철기의 전통을 이 유적에서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철판을 두드려 길게 늘인 뒤 둥글게 말아 붙인 제작 방법은 철을 다루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칠기에서도 새로운 것이 확인되었는데 1·2차 조사 때는 칠기에서 주칠이 보이지 않았으나 원통형 칠기의 구연부 상단에 주칠로 된 삼각거치문(三角鋸齒文)이, 칠초에는 주칠로 된 선문(線文)이 있어, 이 시기에 흑칠 이외에도 주칠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칼집도 확인되었다. 칼집은 형태가 세장한 장방형의 것으로 기존에 타 유적을 통해서 알려진 형태와 더불어 칼집 형태의 새 자료가 확인된 것이다.

토기에서도 1·2차 조사에서 발견되지 않은 승문(繩文)이 타날된 토기가 출토되었다. 세승문(細繩文)이 타날되고 그 위에 1조의 선문이 있는 항아리[短頸壺]가 출토되어 이 유적이 철기시대 전기에 속하는 유적이지만 약간의 연대 폭을 가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소형 토기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우각형동기(牛角形銅器), 유구동기(有鉤銅器), 쌍두관상동기(雙頭管狀銅器)가 정식 발굴 조사에 의해 출토되어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다호리 출토 유물의 또 다른 특징은 부장품 중 청동 제품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굴의 피해를 입은 것이 많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소편(小片)이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던 점은 주목된다. 1~4차 조사에서는 청동 유물이 여러 점 출토된 1호분을 제외하고는 일부 널무덤에서 동검(銅劍), 동모(銅矛) 등의 무기류가 1~2점씩 출토되었다. 무기류에만 일부 상징적으로 잔존되었던 세형동검문화의 내용이 시기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인접된 분묘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다호리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빨리 철기 문화를 소화함으로써 청동기 문화가 급격히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유물 가운데 칠초세형동검, 칠초철검, 철과(鐵戈), 쇠뿔잡이항아리 등의 유물은 서북 지방 널무덤에서 출토된 고조선적 요소와 남부 지방의 철기시대 문화의 연속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성운경(星雲鏡), 오수전(五銖錢), 대구(帶鉤), 칠목기(漆木器), 칠초철검, 고리자루칼[環頭刀] 등은 한식(漢式) 유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경주 조양동에서도 일부가 출토된 바가 있다. 이것은 철기시대 초기에 한반도 남부 지방과 한(漢), 낙랑(樂浪)과의 교섭이 활발하였음을 알려 주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