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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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신종환 |
현 소재지 | 달제리 요지 -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달제리 1567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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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신락리 요지 -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신락리 187-3임 |
현 소재지 | 길천리 요지 1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 815답 |
현 소재지 | 길천리 요지 2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 771-1답 |
현 소재지 | 신안리 요지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신안리 산103-1 |
현 소재지 | 전흥리 요지 -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전흥리 244답 |
현 소재지 | 작승리 요지 -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작승리 592-1답 |
현 소재지 | 송내리 요지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573전 |
현 소재지 | 윤암리 요지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산6 |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 있는 질그릇이나 사기 그릇, 기와 따위를 굽는 가마가 있던 옛터.
[가마터 유적의 개요]
가마터는 인간이 토기를 발명하여 사용한 신석기 시대 이래로 남겨지기 시작한 유적이다. 선사 시대의 가마터 유적은 주로 토기를 굽던 토기 가마와 숯을 만들기 위한 사용한 숯가마가 있으며, 역사 시대로 접어들면서 토기 가마뿐만 아니라 자기 가마, 옹기 가마, 기와 가마를 비롯하여 쌈을 찌는 삼가마, 쇠를 녹이는 쇠부리 가마 등이 남겨지기 시작하였다.
이 중 토기와 자기, 기와 가마는 주로 산기슭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되었는데, 이러한 지형적 조건 외에 더욱 중요한 요건이 재료와 연료의 공급이 원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가마 유적들이 산간 오지에 위치하는 경우는 대체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이 밖에도 수요처와의 교통 사정도 가마터 입지의 관건이 되기도 했다. 경상북도 의성 지역은 선사 시대로부터 다양한 유적이 분포하는 점으로 보아 여러 시대에 걸친 많은 가마터 유적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밝혀진 유적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문헌 사료에 보이는 의성의 가마터]
의성 지역 가마터 유적과 관련한 가장 이른 자료는 1454년(단종 2)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이다. 그 의성현(義城縣)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자기소 한 곳과, 도기소 한 곳이 있는데 모두 의성현 서쪽의 금석리에 있고 품질은 하품이다[磁器所一 陶器所一 皆在縣西 金石里 下品]” 라는 내용이다.
또한 1469년(예종 1)에 간행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도기소가 있는데 의성현의 동쪽에 있는 허어리에 있으며 품질은 하품이다[陶器所 在縣東許於里品下]” 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의성현 서쪽의 금석리(金石里)와, 동쪽의 허어리(許於里)가 지금의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분청사기와 초기의 옹기를 굽던 가마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밝혀진 가마터 유적 가운데 이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향후 정밀한 문헌 조사와 지표 조사 등을 통해 학술적으로 고증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의성의 가마터 유적 현황]
현재까지 확인된 의성 가마터 유적은 길천리 가마터, 작승리 가마터, 전흥리 가마터, 송내리 가마터, 윤암리 가마터, 달제리 가마터, 신락리 가마터, 신안리 가마터 등 모두 8개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작승리·송내리·윤암리 가마터는 기와 가마터[瓦窯址]이고, 전흥리·달제리·신락리·신안리 가마터는 자기 가마터[磁器窯址]이다. 그리고 길천리 가마터는 기와 가마터와 자기 가마터가 함께 있다.
이들 유적 가운데 다인면의 달제리 가마터·신락리 가마터를 제외하면 모두 의성군의 동부 산지에 치우쳐 분포하는 양상이다. 이러한 분포 상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가마 운영에 필요한 다량의 연료와 점토의 공급이 원활한 곳을 택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가마가 운영될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한 오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달제리 가마터·신안리 가마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마을이나 그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 유적으로 접근하는 데 어려움은 거의 없다.
의성군의 가마터 유적들은 대부분 구릉지나 경사진 지형의 논밭과 민가가 있는 마을주변에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농지 개간이나 농로 개설과 민가 개축 등으로 인하여 많이 훼손되고 있는 상태이다. 길천리·전흥리·송내리·윤암리·달제리 가마터 등은 밭이나 논으로 개간하거나 경작 과정에 파괴되고 있고, 길천리·작승리·신락리 가마터 등은 마을에 위치해 있어 민가의 증축이나 개축과 관련하여 많이 훼손되고 있다. 이처럼 현재 의성의 가마터 유적들은 모두 지표 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이며, 발굴 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시기와 성격이 밝혀진 경우는 없다. 또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가 문화재로 관리하는 유적도 없고, 대부분 사유지로 되어 있어 제도적으로 보호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최근 의성군 봉양면 사부리에서 지금까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분청사기 가마터유적이 찾아져 주목된다. 안평천 양안의 제방을 개축하는 공사를 추진하던 중 안평천에 접한 구릉 사면에서 확인되어 2013년 4월 발견 매장 문화재로 신고된 유적이다. 유적 현장에는 인화분청 및 귀얄분청자의 파편과 도침, 가마 벽체의 잔해 등이 산재해있어 16세기 전후에 조업한 것으로 판단되며 향후 정밀 조사가 기대되는 유적이다.
[의의와 과제]
지금까지 확인된 의성의 가마터 유적은 극히 일부만 찾아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컨대 의성 지역에 분포하는 삼국 시대 고분에 부장된 엄청난 양의 토기를 의성 지역 내에서 생산했다고 가정할 때, 현재 삼국 시대 토기 가마터 유적이 한 곳도 찾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인화분청사기 가운데, 제작지와 공납 받은 관청명이 분명한 ‘의성장흥고(義城長興庫)’ 명(銘) 분청사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성군 어디에서인가 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송내리 가마터와 윤암리 가마터 유적이 있는 점곡면(點谷面)의 명칭이 가마터와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현재 확인된 가마터 유적의 보존과 함께 향후 지속적으로 가마터 유적에 대한 학술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