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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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生浦 |
영어의미역 | Jangsaengpo |
이칭/별칭 | 장성포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학동|학용동|안산동|소호동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박종길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쌍봉동 일대에 있던 포구.
[형성 및 변천]
고려시대부터 현재 여수시청이 들어선 지역을 장생포라고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순천부 선소로 알려졌으며,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쌍봉이라 하였다. 여수국가산업단지 건설로 여천지구출장소에서 여천시로 변했다가, 1998년 삼여통합 후 구여수와 신여수를 구분하여 서여수라 호칭하기도 했지만, 아직 여천과 쌍봉으로 호칭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장생포 지역은 구 여천시의 시내지역으로 현재의 전라남도 여수시 쌍봉동 일대를 말한다. 좁은 의미로 여수시 안산동의 장성마을 앞 포구를 말하기도 하지만, 옛 장성포의 의미는 장성마을을 포함한 오늘날의 쌍봉동 일대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관련기록]
『고려사(高麗史)』에는 고려 후기 전라만호이던 유탁(柳濯)[1311~1371] 장군이 왜구를 물리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장생포 지역에 침입한 왜구는 토벌군의 위용에 기가 질려 스스로 철수하였다고 하며, 이에 토벌군은 전승을 기뻐하여 「장생포곡(長生浦曲)」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시중 유탁이 전라도에 나가 주둔하면서 위엄을 갖춰 은혜를 베푸니, 군사들이 그를 어렵게 여기면서도 좋아했다. 왜적이 순천의 장생포를 노략질함에 미쳐 유탁이 구원병을 이끌고 나아가자, 왜적이 멀리서 보기만 하고도 두려워하며 곧장 무기를 거두어 돌아가 벼렸다. 군사들이 기뻐하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려사(高麗史)』 71 악 2 속악 장생포)
1967년 여천동 안골에서 발견된 전라남도 동종에는 고려시대 선종(宣宗)연간 연호와 장생사(長生寺)란 절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순천부의 조선시대 고지도에도 쌍봉동 지역의 포구를 장생포로 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