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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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濯 |
영어음역 | Yu Tak |
이칭/별칭 | 춘경(春卿),성재(誠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소호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고려 후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춘경(春卿), 호는 성재(誠齋).
[활동사항]
유탁은 고려 후기 1311년(충선왕 3)에 태어나 26세인 1337년(충숙왕 6)에 감문위대호군이 되었고, 1341년(충혜왕 2)에 도첨의참리, 전라양광도도순문사, 찬성사까지 승진하였다. 1344년(충혜왕 5)에는 원으로부터 지금의 마산에 본영이 있던 합포만호로 임명되었다. 1347년(충목왕 3)에는 평리, 1349년부터 1351년까지는 다시 찬성사, 전라양광도도순문사를 지냈다.
여수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의 출현이 잦은 1352년(충정왕 3)에 유탁 장군은 전라만호가 되었다. 여수 지역에 내려와 사졸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군기를 엄정히 한 유탁 장군은 왜구들이 침범할 때마다 그들을 잡았다가 혼을 내 돌려보내기도 했는데, 그 인상이 얼마나 위엄이 있었던지 왜구들은 유탁 장군의 화상만 보아도 혼비백산 도망치곤 하였다.
한번은 지금의 안산동 장성마을 앞에 왜구들이 출현하여, 유탁 장군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추격하여 끝내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왕으로부터 특별히 옷과 술을 하사 받고 군사들과 함께 나누어 입고 마시며 당시 장생포를 비롯한 여수 민중들이 불렀던 민요를 월령체로 재구성하여 둥둥 북을 치고 노래하며 즐겼는데, 이것이 고려가요 동동일 것으로 보고 있다. 기록된 문헌 말고도 장성마을, 선소, 고락산 아래 망마경기장 위 동동골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여수 지역을 떠난 유탁 장군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경기병마도통사, 경상도순문겸병마사, 문하시랑평장사, 첨의좌정승까지 지냈다. 그 후 노국공주의 영전 신축을 반대하다가 한때 하옥을 당했는데, 공민왕의 신임을 받던 신돈(辛旽)이 처형되자 그와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공민왕 1371년(공민왕 20)에 주살 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1397년(태조 6)에 태조는 보국숭록대부 고흥백을 추증하고 충정(忠靖)이란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