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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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의미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장여동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남도 여수의 역사.
[변천]
1392년 조선 개국시 여수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신왕조에 불복하였다 하여 1396년(태조 5)에 여수현과 돌산현이 폐지되고 순천도호부에 속한 여수면이 되었다. 소라포부곡은 소라포면, 율촌부곡은 율촌면이 되었으며 삼일포향은 삼일포면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돌산현은 여수면으로 흡수되고, 인근 섬들은 낙안, 광양, 흥양[현 고흥] 등에 분속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대대적인 군현의 통폐합이 단행되었으나, 여수현은 복원되지 못하였으며, 돌산현이 해체되었다. 돌산현의 해체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연안 도서를 독자의 군현으로 편제하기보다는 수군 진지로 편성하고자 하는 방침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여수 지역은 해안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방안으로서, 진례량과 돌산에 만호진이 설치되었다. 이후 1423년(세종 5) 진례만호진은 폐지되고 내례만호진이 설치되었다.
1479년(성종 10) 1월에는 진이 폐지되고 오동포(梧桐浦)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이 창설되고 수사가 부임하여 전라도 동남부의 수군을 통할하게 되었다. 이후 1523년(중종 18)에는 돌산포만호진이 혁파되고 방답진이 창설되었다. 방답진은 1895년 진이 폐지될 때까지 370여 년 동안 해안 방어의 전진 기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경상도의 좌수영과 우수영이 허물어져 국토의 대부분을 일본군이 점령하였다. 그러나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었던 여수 지역은 이순신을 비롯한 장군들과 황득중(黃得中)을 비롯한 지역민들의 승전으로 전라도 지역을 지키게 되었다.
여수 지역에서의 승리는 조선 군대가 전열을 정비하고, 명나라 군대의 원조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에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중에는 흥국사에서 수행에 정진하던 승려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승수군(義僧水軍)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지역 백성들의 피와 땀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특히 1593년(선조 26)에는 여수 지역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어, 전라·경상·충청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601년 삼도수군통제영이 경상도 거제로 옮겨가고 전라좌수영만 남았다.
1695년(숙종 21)에 여수도호부가 설치되면서, 순천부가 관할하던 18개 면 중 여수면·율촌면·소라면·삼일면·용두면의 5개 면이 여수부 관할이 되었으나 다음해에 곧바로 여수부가 폐지되었다. 이후 1725년(영조 1)과 1750년(영조 26)에 두 차례 복원되었다가, 두 차례 모두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군되었다.
1885년(고종 22) 4월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하여 1887년 3월까지 주둔한 거문도 사건이 있었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군이 전라좌수영성을 공격한 전투도 있었다. 1895년 전라좌수영이 폐지되고, 1896년 도서 지방에 돌산군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복현 운동의 결과로 1897년(고종 34) 순천도호부에서 분리 독립하여 육지 지역에 여수군이 설치되어 여수·율촌·삼일·소라의 4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왕조 500년의 기간 동안 여수는 삼복삼파(三復三罷)의 군현 폐지와 임진왜란의 국란을 겪으면서도 지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문화유적]
조선시대에 여수 지역에 이루어진 문화유적으로는 1485년부터 5년 8개월 간에 걸쳐 축조된 전라좌수영성, 돌산포만호진성, 장군성, 돌산향교, 여수향교, 1620년(광해군 12)에 세워진 통제이공수군대첩비, 여수 충민사, 여수 진남관과 방답진성 터와 여수 선소 유적, 봉수지 등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