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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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鴻植 |
영어음역 | Gim Hongs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교동 234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병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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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남도 여수시 교동 234[진남상가길 21-1] |
성별 | 남 |
생년 | 1897년 1월 11일 |
몰년 | 1966년 6월 10일 |
본관 | 영광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화가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김홍식은 여수시 교동 234번지[진남상가길 21-1]에서 1897년 1월 11일 김한익과 유목임 사이의 7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세 때인 1910년 여수보통학교[현 여수서초등학교]가 문을 열자 1회로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5학년 때인 1914년 정재진과 결혼했다. 191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유지의 추천을 받아 당시 명문 학교였던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활동사항]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1919년에 3·1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학생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결국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궐석 재판을 받았다. 그 후 여수에 피신해 있던 김홍식은 1922년 법률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진로를 바꾸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김홍식은 동경미술학교 후지시마 교실에서 서구적 조형 기법을 익힌 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
김홍식은 1928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후 맞돕회 등 청년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여수농민회에 참여하여 민족개화운동에 앞장섰으며, 1928년 남조선철도주식회사가 광주와 여수 간 철도 건설을 빌미로 여수 지역 토지를 매입하여 투기를 하려는 속셈에 반발해 남철도토지매입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30년 여수 청년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여수청년회관 건립에도 적극 가담해 여수 청년운동에 기여하였다. 언론 사업에도 참여한 김홍식은 1933년 조선일보사 여수지국을 운영한 뒤 절골에 은둔하였다. 미군정 시절, 김홍식은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김구, 김규식 계열의 민주자주연맹에 동조하였다. 이후 만흥동 천성산 기슭에 화실을 짓고 화업에 몰두하며 여생을 보낸다.
[저술 및 작품]
「자화상」, 「나부(裸婦)」, 「욕장」 등 인물화와 누드 4점, 「다리가 있는 풍경」 등 풍경화 8점, 「백모란」, 「화병」 등 정물 4점이 있다.
[의의와 평가]
김홍식이 화가로서 본격적으로 조명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95년에 열린 ‘전남미술 50년’에 대표작 「욕장(浴場)」이 출품되면서부터였다.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현대미술을 재평가하는 기획전으로 1997년 2월 9일부터 1998년 3월 10일까지 열린 ‘한국근대미술-유화, 근대를 보는 눈’에 초대됨으로써 그가 작고한 지 30여 년 만에 공식적인 전람회에 작품이 공개되어 새롭게 조명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기획전을 통해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계몽 활동가로서뿐 아니라 화가로서의 면모가 밝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