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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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The Korean Silicon Valley, Gumi Industrial Complexes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호균 |
[개설]
“2011년 산업 생산 75조 원, 수출 330억 달러 목표 달성” 이것은 외국에 있는 어떤 첨단도시의 이야기도 국내의 대도시 이야기도 아닌, 바로 인구 39만 명의 한국의 지방도시인 경상북도 구미시의 2011년 경제 목표이다. 구미시는 한국 내륙 최대의 첨단 전자·정보통신 산업단지와 선진 농업을 기반으로 2011년에 생산 75조 원, 수출 330억 달러를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계화를 발판으로 하여 함께 호흡해 나가는 글로벌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서남부에 위치한 구미시는 서울로부터 277.5㎞, 부산으로부터 167㎞ 거리에 입지해 있으며, 면적은 615.53㎢로 서울시보다 조금 큰 경상북도 전체의 3.2%에 달한다. 인구는 41만 명이고, 선산읍·고아읍을 비롯한 6개 면, 19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국내 내륙의 한 지방 도시가 국내 최대 수출도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한국 최초의 공업단지이자 근대화의 상징인 구미공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
과거 구미는 선산군 중심의 농업이 산업의 주축을 이루었으나, 전자산업 중점 육성을 위한 산업단지의 확충 및 수출 진흥과 지역 간 균형 발전 및 국민 경제의 향상 등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구미공단이 조성되면서 내륙 최대의 첨단 수출산업단지를 보유한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재, 구미시 주민의 평균 연령은 32세로 30대 이하가 도시 전체 인구의 68% 이상을 차지하여 매우 활력이 넘치는 젊은 도시이다.
2010년 11월 현재 구미시에는 구미1공단·구미2공단·구미3공단·구미4공단을 포함한 약 24,073,000㎡의 국가단지와 고아농공단지·해평농공단지·산동농공단지를 포함한 337,000㎡의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입주업체로는 삼성과 LG 등 61개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2,251개사가 입주하여 있고 80,438명의 근로자가 종사하고 있으며 주요 생산품으로는 반도체, 휴대폰, LCD, TV, 브라운관, 정보통신기기 등이 있다.
또한 구미국가산업단지는 「수출산업공업입지 개발조성법」을 근거로 하여 개발되었고, 입주 자격 요건도 “수출 상품에 관한 제조 기술과 수출 실적을 보유한 사람이나 장차 수출 전망이 확실하고 수입 대체나 신기술 개발 효과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구미국가산업단지는 수출에 유리한 전자산업과 섬유산업이 주를 이루게 되었으며, 현재 생산액 기준 산업 구성은 전자 분야가 82.3%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석유화학 6.4%, 비금속 4.5%, 섬유 2.7%, 기계 2.3%, 기타 1.8%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미국가산업단지는 1974년에 최초로 7,900만 달러를 수출한 이래, 1975년도에 1억 달러 돌파, 그리고 30여 년 만인 지난 2005년에 지방자치단체로는 전국 최초로 수출 30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미국가산업단지는 2006년에도 국제 원유 가격 상승, 환율 하락,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2005년 수출액을 상회하는 305억 달러의 실적을 올려 2년 연속 300억 달러를 초과 달성하는 실적을 올렸다. 2006년 구미세관 통관 무역수지 흑자 또한 197억 달러를 달성하여 전국 무역수지 흑자 166억 달러의 118%를 차지함으로서 국내 최대의 지속적인 흑자 기조를 유지하여 국가 수출 증가와 무역수지 증대에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 왔다. 2007년에는 수출 342억 달러, 2010년에는 306억 642만 달러를 달성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있던 1970년대만 해도 구미라 하면 ‘대통령의 고향’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경제개발 정책의 핵심 사업으로 1969년 국내 최초로 조성되기 시작한 구미공단으로 인해 이제 구미시는 수출 330억 달러를 목표로 하는 한국 디지털 산업의 중심이며, 사통팔달의 교통망·물류망을 갖춘 첨단 산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즉, 구미공단은 한국 전자산업의 메카로서 국가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한국의 실리콘밸리’인 것이다.
[한국 최초의 공업단지, 구미공단의 태동]
“한국의 실리콘밸리 구미공단”의 태동은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출 지원에 중점을 둔 강력한 경제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구미공단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철학인 ‘빈곤으로부터의 탈피’와 ‘자립 경제의 달성’이라는 이상의 실천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구미는 오늘날 세계 전자산업의 메카이면서 우리나라 화학섬유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구미는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고향이라는 점으로 인해 혹자는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재직 시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라는 민족의 숙원을 풀기 위해 구미공단을 건설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박정희라는 이름의 위력으로 만들어진 구미공단이 우리나라의 현대 공업 발전의 저력을 상징하는 성지(聖地)로 불릴 만큼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구미공단의 건설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와는 별개로 구미공단의 탄생에는 우리나라 산업화에 대한 시대적인 요구와 더불어 구미가 가진 자연적이고 지리적인 최적의 조건이 작용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 하겠다.
구미공단의 탄생 배경은 먼저 시대적 요구에서 찾을 수 있다. 4·19의거와 5·16 군사 정변 이후 생겨난 개혁적인 사회 분위기는 6·25전쟁 동안 완전히 피폐하였던 한국 경제가 고도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로 인하여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 자본의 축적이 미약한 상태에서 국내 자본의 조달만으로는 각종 대형 사업의 추진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을 충당하기에 부족하였다. 이에 정부는 수출에 의한 외화 조달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경제 정책을 수립하였다. 수출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결과 1960년대 10년 동안 수출이 무려 23배나 급증하는 쾌거를 이룩하게 되었다.
한편, 1960년대 한국의 수출을 주도한 것은 대구의 섬유산업이었다. 이에 정부는 대구의 섬유산업과 연계된 수출전략산업의 육성 필요성과 더불어 새로운 전략산업의 육성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경우 올림픽 개최 성공 이후 전자산업이 경제 성장의 견인차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우리나라 정책 결정자들은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었다. 전자산업과 섬유산업의 지속적인 육성이야말로 경제 발전의 핵심이라고 인식한 정부는 이러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공단의 조성을 시급한 과제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인 공단 조성에 있어서 구미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구미는 대구에 인접해 있어서 대구 섬유산업의 풍부한 인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고, 또한 김천시·상주시·칠곡군·군위군·성주군 등의 유휴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어 노동력 공급에서 유리하였다. 이와 동시에 낙동강으로부터 양질의 공업용수를 확보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즉, 구미공단의 탄생은 박정희 대통령의 ‘빈곤으로부터의 탈피’와 ‘자립 경제의 달성’이라는 정치 철학과 지도력에 기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당시 전략산업이었던 섬유산업과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한 공단 조성에 구미가 이상적인 지리적·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 1969년 1월 3일 ‘구미공업단지 설립추진대회’가 열렸고 같은 해 6월 4일 건설부 고시 제321호로 공업단지 사업시행자를 지정함으로써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구미공단 조성의 시발이라 할 수 있는 구미1공단 조성은 처음부터 2개의 사업 주체가 구심점이 되어 시작되었다. 즉 섬유업종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단지는 경상북도가 주체가 되어 1970년 1월 1일에 제정된 「지방공업개발법」에 의거하여 조성되었고, 전자업종을 중심으로 하는 전자단지는 한국전자공업공단이 주체가 되어 「전자공업육성법」에 의거하여 조성되었다.
일반단지 제1공구는 주민 스스로 공단 유치 활동을 벌이고 경상북도가 ‘지방공업개발 장려지구’로 선정하면서 가장 먼저 조성에 착수하였고, 초창기에 입주한 업체들은 대지를 선산군으로부터 원지 상태로 분양받아 업체 스스로 조성하였다. 일반단지 제2공구는 구미1공단의 서남쪽 부분으로 업체 위치로 보면 제일합섬(주), 제일모직(주), 윤성방적(주) 일대와 열병합발전소 부근, 동국방직(주) 부근이며, 경상북도에서 직접 조성에 나섰다. 이 사업을 주관한 경상북도는 제2공구 공사가 한창인 1973년 6월 18일 일반단지 조성 업무와 관리 업무를 한국전자공업공단에 이관함으로써 구미공단 전체의 관리권이 이전되어 효율적인 수출 지원과 공단 관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전자단지 제1공구는 일반단지 제2공구와 동시에 착공되었고, 구미1공단 북쪽 비산동 일대와 신계동 일대의 구릉지와 전답을 개발하여 조성하였으며, 한일산업(주)에 의해 시공된 이 공사는 1971년 11월 3일에 시작되어 이듬해 6월 20일에 준공되었다. 제2공구는 구미1공단의 중심부를 이루는 지역이며 1973년 2월 착공하여 같은 해 9월 대림산업(주)에 의해 준공되었다. 제2공구의 조성은 제1공구의 분양이 완료되고 구미공단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높아져 입주 신청이 쇄도함에 따라 늘어나는 공장 용지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1972년 12월 19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 하에 구미공단 확장에 관한 회의가 개최되어 660,000㎡ 규모의 전자단지와 1,056,000㎡ 규모의 일반단지를 확장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자단지 제3공구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회의에서 단지 동편의 하천 부지 개발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한국수자원개발공사에 지시한 데서 연유하여 구미1공단 동남부 지역 낙동강변의 하천 부지를 매입하여 조성되었다. 이로써, 한국 최초의 공업단지가 탄생하여 근대화의 상징인 구미공단의 대역사가 태동한 것이었다.
[한국 근대화의 견인차]
정부의 강력한 ‘수출 중심의 경제개발계획’의 핵심 과제 중의 하나로 조성되기 시작한 구미공단은 1969~1973년에 구미1공단을 조성한 이후, 1977~1981년에 구미2공단을, 1987~1995년에 구미3공단을, 1998년부터 2008년까지 구미4공단을 조성하였다. 이처럼 구미국가산업단지는 다른 산업단지와는 달리 지난 30여 년 동안 그 규모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는 특징을 띠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단지 별로 산업의 특성이 조금씩 상이하게 나타난다. 구미1공단은 섬유산업의 비중이 많은 반면, 구미2공단은 주로 전자업종의 대규모 기업이 입주해 있고, 구미3공단과 구미4공단은 주로 전자업종의 첨단 중소기업이 입주해 있다. 이것은 구미공단이 시대적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국가 산업 및 공업 발전과 함께 해온 데 기인한다.
초창기 구미공단은 구미1공단을 중심으로 섬유산업과 가전제품의 조립생산 단계의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전자산업은 양적으로는 성장하였지만 단순 조립생산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 산업의 근대화를 위해선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 집약적인 반도체·컴퓨터 산업의 육성이 필요하였다. 전자산업을 집중 육성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1975년 1월 상공부는 재차 전자산업의 획기적인 육성을 위한 장기 진흥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구미1공단의 입주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인 1976년 12월 구미공단의 건의로 정부는 반도체와 컴퓨터 산업과 이에 관련된 전문 연구소의 유치를 위해 낙동강 건너 구미1공단 맞은편인 칠곡군 인동면의 임수동, 황상동, 구포동 일대 1,980,000㎡ 규모의 구미2공단 조성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구미2공단은 1977년 7월 19일에 시작되어 1981년 10월 미조성 지구 일부를 남겨둔 채 조성 완료되었다. 구미2공단 입주는 불황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1982년 말에는 14개 업체가 가동, 12개 업체가 건설 중이었고, 1983년 말에는 21개 업체가 가동, 7개 업체가 건설되는 등 1986년에는 대부분 업체가 입주하였다. 뿐만 아니라 1980년 2월 부분 가동에 들어간 금성반도체(주)를 비롯해 동년 7월에는 국내 최초의 컴퓨터 공장인 동양나이론(주)와 신소재 업체인 선광세라믹스(주)가 가동에 들어갔다.
특히 구미2공단 조성과 동시에 입주한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1985년 대덕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팩시밀리, 16비트 PC를 개발하고 전자교환기 기술을 토착화시키는 등 구미 지역의 전자산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한국코실(주)와 한국QME(주)는 각각 고순도 실리콘 웨이퍼, 석영 제품을 생산하여 수입 대체 효과와 반도체·컴퓨터 산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전자 부품의 협동공장의 입주는 섬유 분야에 이어 전자 분야에서도 협업화와 계열화를 촉진시켜 시설의 공동 이용과 운송비 절감에 의한 원가 절감의 효과로 전자 제품의 대외 경쟁력을 향상시켰다.
이처럼 구미2공단의 건설은 국가의 전자산업을 한 단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외 경쟁력을 확보하고 컴퓨터·반도체 등의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국가 근대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화의 상징인 구미공단의 전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구미3공단의 건설이 한창이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구미국가산업단지의 산업 구성은 전자업종을 중심으로 재구조화되어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된다.
예컨대, 구미1공단 내에 있는 섬유산업 집적지라고 할 수 있는 구미직물협업단지의 경우 이미 입주해 있던 섬유산업 업체가 중국 등 외국으로 이전해감에 따라 협업단지 내에 전자업종의 중소기업들이 시설들을 임대하기 시작했는데, 협업단지는 단지 조성 초기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산업 기반 시설이 노후화되어 있었다. 그 결과 저렴한 임대료로 인해 영세한 전자 관련 중소기업이 섬유산업 업체 이전 후에 생산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구미는 전자 도시로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으며 대기업·중소기업 간 상생의 기반을 다짐으로써 탄탄한 산업 구조를 구축할 수 있었다.
구미2공단 조성 공사가 마무리 되어 갈 무렵인 1979년 5월 21일 정부가 반도체·컴퓨터 등 첨단산업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늘어나는 공장 용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건설부 고시 제179호로 구미2공단 남쪽에 추가로 5,478,000㎡ 규모의 산업기지 개발구역을 고시함에 따라 구미3공단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잠시 시행이 지연되던 구미3공단의 조성은 산업기지개발공사와 1단계 단지조성협약을 체결한 후 순조롭게 조성 공사를 시작하여 1988년 12월 2단계로 잔여 1,122,000㎡에 대해 한국수자원공사와 공장 부지 조성 계약이 체결되었고 1995년 9월에 구미3공단이 준공되었다.
1989년 10월 25일 구미3공단의 입주 기업인 삼성코닝(주)이 가동에 들어갔는데 종전까지 수출에 의존해 왔던 VTR용 소프트페라이트, 파인세라믹스 등을 생산하여 연간 2억 6천만 달러의 수입 대체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1992년 초 (주)금성사, 동양맥주(주) 등의 국내 일류 기업들이 입주함으로써 구미공단은 바야흐로 우리나라의 현대 공업력을 상징하는 성지로 발돋움하였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 구미공단은 섬유산업에서 전자산업 중심으로 국가 산업이 재편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였고, 컴퓨터·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발전에 물꼬를 튼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구미공단은 우리나라 공업을 근대화로 이끈 상징적인 공단인 것이다.
[끝나지 않은 신화, 그리고 도전과 과제]
한국 최초의 공단인 구미1공단과 전자산업의 근대화를 이끈 구미2공단·구미3공단의 건설로 구미공단은 지난 30여 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왔다. 하지만, 구미공단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로 구미4공단의 조성으로 구미공단은 단순 집적지에서 혁신 클러스터로 기능 고도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구미4공단은 전자·컴퓨터·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경제 활동 지원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통한 지역 균형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1996년부터 구미2공단, 구미3공단과 연계한 구미4공단 조성 사업에 착수하여 2008년에 완료되었다. 사업비 6,905억 원을 투자하여 6,785,000㎡ 규모로 조성된 구미4공단은 2010년 11월 현재 349개의 업체가 입주하였고, 264개의 업체가 가동 중에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조성과 분양을 관장하고 있으며 유치 업종은 전자·반도체·컴퓨터 등 15개 업종으로 가능한 많은 기업체들에게 입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대형 프로젝트 사업을 통하여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약 934,000㎡의 규모의 외국인기업전용단지가 지정되고 적극적인 외국기업 유치를 통하여 아사히글라스, 도래이사 등 외국인 업체가 입주하였다.
지방 소재 중소기업의 생산 활동의 적극 지원을 목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공장 용지를 임대하기 위하여 약 116,000㎡ 규모의 국민임대산업단지를 지정하여 개발하였으며, 약 330,000㎡의 임대전용산업단지(New Biz Park)를 지정하여 개발하였다. 또한 전자·정보통신 기기 분야의 과학기술과 산업 생산을 연계시키면서 연구 개발 역량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높이고자 약 107,000㎡ 규모로 구미디지털전자정보기술단지를 개발하였고, 이외에도 국내 기업 이전 인센티브 제공 등 활발한 투자 유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2005년 1월 산업자원부에서 구미국가산업단지를 포함한 7개의 시범단지를 혁신 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한 추진 계획을 확정함으로써, 구미국가산업단지는 단순 집적지에서 혁신 클러스터로 기능 고도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구미혁신클러스터 추진계획의 주요 목적은 생산 중심의 현행 산업단지를 연구 개발 역량이 보안된 혁신 클러스터로 전환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 산학 연관 네트워크, 핵심 연구역량 확충, 단지구조 고도화 및 정주 여건 개선, 국내외 교류·협력 등 4대 중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산업구조 상 대규모의 공장 용지가 필요한 산업은 우리나라의 경제여건에서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벤처와 같은 중소기업, 지식집약 기업이 미래 산업을 주도할 것이라고 예측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대기업 생산 공장 역할만으로는 구미공단의 장래가 밝다고 말할 수 없다. 1999년에 들어와서 수출이 활기를 띠고 있으나 구미공단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저임금에 기반을 둔 공장의 해외 이전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LG, 삼성 등의 대기업들이 해외 이전을 가시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도권 규제 완화로 인한 공장 이전 현상이 벌써부터 가시화되고 있어, 독자적으로 생존 전략을 펼 수 없는 중소기업의 자생 능력으로 인한 공장 이전 도미노 현상을 심각하게 우려해야 한다. 또한 구미공단의 기업은 본사 기능과 연구 기능을 없애고 대부분 생산 기능만 가지고 있어 꾸준한 성장 동력을 창출하기 힘들며 벤처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지식 인프라가 허약하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구미공단은 이러한 과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구미공단이 독자적으로 고급 기술, 지식 기반 등을 가진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있으므로 지금까지 독자적인 발전과 운영에서 벗어나 대구 및 경북의 전략 산업들과 연계한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연계적인 지식 기반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경상북도 내 4개 권역별 특성화 및 연계화 추진으로 활동해 산업 기술의 전략적 중심지화를 추진하고 권역별 특성화를 기반으로 한 구미-칠곡-대구-경산을 연계한 IT산업 밸리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즉 지역 혁신의 다양화와 탁월화, 지역 산업의 특성화와 연계화, 권역별 혁신 역량의 극대화와 권역 간 혁신 격차의 최소화 추구라는 목표를 가지고 주변 지역의 전략 산업과 함께 역동하는 공단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할 것이다.
한국 최초의 공업단지이자 근대화의 상징인 구미공단의 미래는 단순히 구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산업 전체의 문제이며 국가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현재 구미공단은 ‘정체와 도태’ 그리고 ‘변화와 도약’ 사이의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앞으로 구미공단은 지난 영광을 잊고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을 통하여 지역과 산업, 그리고 국가와 경제 발전을 이끌어갈 중추적인 동력으로 계속 발전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