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0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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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麗元聯合軍日本遠征 |
영어의미역 | Goryoe-Won Forces' Expeditions against Jap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고려시대 일본 원정을 위해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펼쳐진 여원연합군의 군사 활동.
[개설]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의 일본원정은 1274년(충렬왕 즉위년)과 1281년 2차례에 걸쳐 원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고자 했던 사건을 말한다. 세계제국 건설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원나라의 강요에 따라 이루어진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군사 활동으로 인해 고려는 막대한 인력과 함선 및 군량을 조달해야 했다. 당시 창원 지역도 출정을 위한 여몽연합군의 배후 기지가 되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역사적 배경]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고 강화가 성립됨에 따라 원은 일본 지배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원 세조(世祖)는 일본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기 위해 모두 6차에 걸쳐 고려와 원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이 원의 요구에 불응하자 원은 무력을 동원해 일본을 굴복시키기로 하고 대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발단]
1270년(원종 11) 합포를 기지로 하고 김해 등지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여 일본 정벌을 위한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준비하였다.
[경과]
일본 정벌을 준비한 여원연합군이 전함의 건조와 군량 문제를 해결한 1274년에 1차 원정을 단행하였다. 원 세조의 명으로 원나라의 흔도(忻都)를 도원수로 하고 홍다구(洪茶丘)·유복형(劉復亨)을 각기 좌·우 부원수, 김방경(金方慶)을 도독사로 하였다.
원군 2만 명에 고려군 8천 명의 병력에다 전함 9백 척 규모로 1274년 10월 6일 합포를 떠나 쓰시마[對馬島]를 공략하고 이키시마[壹岐島]를 거쳐 기타큐슈[北九州]의 하카타만[博多灣]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 마침 폭풍우까지 겹쳐 전함이 좌초되고 많은 병사가 익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여 귀환하고 말았다.
1281년(충렬왕 7)에 단행된 2차 원정에서는 총 병력 4만 명(원군 3만 명과 고려군 1만 명)에 전함 9백 척의 규모로 합포에서 출정하였으며, 별도로 멸망한 남송의 군대인 강남군도 10만 명에 3,500척의 배를 동원하여 이에 가세하기로 되어 있었다. 준비 과정에서 고려의 충렬왕이 직접 합포를 방문하여 출정 준비를 독려하는 등 적극성을 보이도 했으나, 2차 원정 역시 작전의 실패와 또 다시 태풍을 만나 10만의 병력 손실과 함께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결과]
두 차례의 일본 원정이 모두 실패로 끝난 후인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은 지역민들의 노고를 감안하여 의안을 의창(義昌), 합포를 회원(檜原)으로 각각 개칭하고 현령을 파견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2차례에 걸친 실패에도 원나라 세조의 일본 정벌 집념은 여전히 계속되어 이후에도 여러 번의 준비와 중단의 과정을 반복하였으며, 결국 세조가 죽었던 1294년(충렬왕 20)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여원연합군의 두 차례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군사적 역할과 기능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또 출정에서 돌아온 부상 군인들의 후속 처리, 전함의 건조 등에 동원된 인력과 물자의 전환, 군량의 대량 유통 등으로 지역의 생산 기반과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이전과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