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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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Devoted Dog's Grave and Cow's Grav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석배 |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의 무덤]
일선교에서 대구로 오다가 일선리를 지나자마자 국도변인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148번지에는 잘 정비된 의구총(義狗塚)이 있어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의구총에는 다음과 같이 주인을 살리고 죽은 의로운 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연향(延香, 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노성원(盧聲遠)이라는 우리(郵吏, 지금의 우체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황구(黃狗)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 개는 천성이 유순하고 눈치가 빠르고 민첩하여 사람의 뜻을 잘 꿰뚫어 보았다. 또한 주인의 명령을 잘 따랐으며 한시도 주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노성원이 이웃 마을에 일을 보러 갔다가 술에 잔뜩 취한 채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노성원은 월파정(月波亭)의 북쪽 한길 가에 이르러 말에서 떨어져 정신없이 쓰러져 자고 있었고, 황구는 주인 옆에 앉아 주인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길 옆 숲에서 일어난 들불이 차츰 번져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노성원 가까이로 타들어오고 있었다. 황구는 주인을 깨우기 위해 노성원의 옷을 물어뜯고 얼굴을 핥고 하였으나, 술에 곯아떨어진 노성원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새 불길이 노성원의 옷에 옮겨 붙을 기세였다. 다급해진 황구는 수백 보 떨어진 낙동강까지 달려가서 온 몸에 물을 흠뻑 적시고 와서는 불에 뒹굴어 불을 끄기 시작하였다. 황구는 있는 힘을 다해 수십 번 왕복한 끝에 겨우 불을 껐으나 안타깝게도 온몸의 털이 심하게 탄 채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아무 것도 모른 채 한참을 푹 자고 난 뒤에 일어난 노성원은 자신의 옆에 몸이 젖고 꼬리가 탄 채 죽어 있는 황구를 발견하였다. 이상하게 여겨 주위를 두루 살펴보니 황구가 불을 껐던 흔적이 있고, 젖은 재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제야 황구가 자신을 구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사정을 알고 깊이 감동하여 추도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후세 사람들이 그 황구를 의롭게 여기고 가엾게 여겼으며, 그 곳을 개 무덤 터[狗墳坊]라고 하였다. 지나가는 길손들은 모두 황구의 의로움을 이야기하고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을 찬탄하였다고 한다. 1665년(현종 6) 선산부사 안응창(安應昌)이 고을 노인에게 의구 이야기를 듣고 「의구전(義狗傳)」을 지었고, 1745년 박익령(朴益齡)이 화공에게 약가(藥哥)의 정열(貞烈)을 그린 「의열도(義烈圖)」 4폭과 함께 「의구도(義狗圖)」 4폭을 그리게 하여 『의열도』에 첨부하였다. 이 외에 낙산리 의구총에 관한 내용이 『일선지』, 『선산부읍지』, 『선산읍지』, 『청구야담』, 『파수록』, 『한거잡록』, 심상직(沈相直)의 『죽서유고(竹西遺稿)』 등에 전하고 있는데, 개 주인이 김성원(金聲遠) 또는 김성발(金成發)로 바뀌기도 했다.
의구총은 1952년 도로에 편입되어 공사중 비(碑) 일부가 파손된 것을 봉분과 아울러 수습하여 일선리 마을 뒷산에 옮겼으나 또 다시 일선리 마을이 조성되자 1993년 원래의 위치에 가까운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의열도』에 있는 「의구도」 4폭을 화강암에 조각하여 봉분 뒤에 세우는 등 일대를 정비하여 의구를 기리고 있다. 봉분은 직경 2m, 높이 1.1m, 화강암에 새긴 「의구도」는 가로 6.4m, 세로 0.6m, 너비 0.24m이다.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2. 의구총 더 깊이 알기
주인의 목숨을 구하는 등 주인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한 개 이야기가 의구설화(義狗說話)인데, 의로운 개를 묻은 무덤인 의구총은 의구설화의 증거물이 된다. 의구설화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광포설화(廣布說話)로, 중국의 경우는 『수신기(搜神記)』, 『태평광기(太平廣記)』, 『청패류초(淸稗類抄)』, 『이견지(夷堅志)』 등에 있고, 일본의 경우는 관경오(關敬吾)의 『일본석화집성(日本昔話集成)』에 여러 자료가 보인다. 우리나라 경우는 고려 때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을 비롯하여 이육(李陸)의 『청파집(靑坡集)』과 같은 문집류나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지류(地誌類)에 많은 자료가 전하고, 전국의 시군지(市郡誌)에 전하는 자료도 적지 않다.
의구설화는 다양한 유형이 있는데, 구미의 의구설화는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한 유형 즉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에 속한다. 이 유형에 속하는 대표적인 자료들은 다음과 같다. ①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천도4리 개 무덤 ②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 ③ 경기도 장단군 분지내 ④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역치리 역제 방죽, ⑤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매송리 개목이[狗項] ⑥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원동산의 오수나무와 의견비 ⑦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개비골[狗碑洞, 可碑洞]의 개 비석 ⑧ 전라북도 김제시 김제읍 순동리 의견비와 개 방죽 ⑨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개 비석 ⑩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 구룡리 신기마을 매개내 의구비 ⑪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양괴리 산정마을 개 무덤과 방죽 ⑫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개 비석과 의구총 ⑬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양호리 의구총 ⑭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1리 최부자네 개 무덤, ⑮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사동 개좌산 ⑯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법대리 개고개[狗峴], ⑰ 황해도 송화군 구총(狗塚), ⑱ 평안남도 중화군 양가묘(楊哥墓), ⑲ 평안남도 삼화군 의구총 ⑳ 평안남도 자산군 구묘산(狗墓山) 등이 있다.
이외에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개가 주인의 억울한 죽음을 관청에 알리고 범인을 찾는데 도움을 주며, 원수를 갚거나 따라 죽었다는 폐관보주형(吠官報主型)을 비롯하여 개가 호랑이와 같은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주인을 구하였다는 투호구주형(鬪虎救主型), 개가 어려움에 처한 주인을 구해 주었다는 위난구주형(危難救主型), 개가 주인의 죽음을 가족에게 알려주거나 주인의 시체를 맹수로부터 지켜 장례를 치르게 했다는 수시부고형(守屍訃告型) 등 다양한 유형의 의구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구미의 의구설화와 함께 우리나라 의구설화를 대표하는 것은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의 의구설화이다. 고려 후기 최자의 『보한집』에 실려 있는 오수의 의구설화를 소개한다. 김개인(金盖人)은 거령현(居寧縣, 현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사람이다. 개 한 마리를 길렀는데, 매우 영리했다. 어느 날 김개인이 외출을 하는데 개도 주인을 따라 나섰다. 김개인이 술에 취하여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데, 들불이 일어나 불길이 번져 오고 있었다. 개는 곧 옆에 있는 시냇물에 들어가 몸을 적시어 불 주위를 빙빙 돌면서 풀을 적셨다. 그래서 불길을 막았으나 개는 힘이 빠져서 죽었다.
김개인은 잠에서 깨어나 개의 모양을 보고는 슬프게 여겨 노래를 지어 슬픈 심정을 나타내었다. 김개인은 개의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주고 지팡이를 꽂아서 표시해 두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지팡이는 나무가 되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오수(獒樹)라고 부르게 되었다. 악보 가운데 ‘견분곡(犬墳曲)’이 이것이다.
훗날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칭송하기를, “사람은 짐승이라 불리는 것 부끄러워하지만/ 공공연히 큰 은혜를 저버린다네/ 사람으로서 주인 위해 죽지 않으면/ 어찌 개와 같이 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진양공(晉陽公) 최이(崔怡, ?~1258)가 문객들에게 개의 전기(傳記)를 지어 세상에 전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세상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갚을 줄 알도록 하기 위한 뜻이었다.
[주인에게 은혜를 갚고 죽은 의로운 소]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 104-1번지에 잘 가꾸어진 의우총(義牛塚)이 있어 사람의 눈길을 끈다. 이 의우총에는 주인에게 은혜를 갚고 주인이 죽자 따라 죽은 의로운 소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옛날 문수점(文殊店, 현 산동면 인덕리)은 삼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산골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사는 김기년(金起年)이라는 농부가 암소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어느 해 여름 김기년이 소에게 쟁기를 매어 산 밑에 있는 밭을 부지런히 갈고 있었다. 미처 다 갈기도 전에 갑자기 숲 속에서 사나운 호랑이가 뛰어나와 소에게 달려들었다. 김기년이 너무 놀라 쟁기를 들고 고함을 지르며 호랑이를 치려 하니 이에 호랑이는 소를 버리고 김기년에게 덤벼들었다. 김기년은 급하여 맨손으로 죽을 힘을 다해 호랑이와 싸우다가 자빠지고 넘어지는 등 위험에 처해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 때 소가 사납게 울부짖으면서 뛰어들어 호랑이를 단단한 뿔로 거세게 떠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만에 호랑이의 허리와 등이 뿔에 꿰뚫려 피가 나고 상처가 깊어졌다. 호랑이는 마침내 기진하여 김기년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몇 리도 못 가서 죽었다.
김기년은 비록 호랑이에게 장단지와 넓적다리를 물렸으나, 얼마 뒤에 정신을 차려 다리를 절며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김기년은 이로부터 호랑이에게 물린 상처가 깊어 이십 일 만에 죽게 되었다. 그는 죽을 때에 가족들에게 “내가 호랑이 밥이 되지 않고 지금까지 숨을 이어 온 것은 누구의 힘인지 알겠지? 내가 죽은 뒤에 이 소를 팔지 말고, 비록 소가 늙어 저절로 죽더라도 그 고기를 먹지 말고, 반드시 내 무덤 곁에 묻도록 해라.”고 하고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다.
소는 비록 사나운 호랑이와 치고받고 싸웠으나 물린 바는 없었으며, 주인이 상처를 입어 누워 있을 때도 전과 다름없이 논밭을 갈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먹었다. 그런데 주인이 죽던 날에 소는 갑자기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날뛰더니 물과 쇠죽을 먹지 않고 삼 일째 되는 날 밤에 마침내 죽었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감탄하여 의우라 이름 짓고 주인 김기년의 무덤 아래 장사를 지내 주었다.
1630년(인조 8) 선산부사 조찬한(趙纘韓)이 의로운 소 이야기를 듣고 감탄하여 ‘의우총’이라는 비를 세우는 한편 화공에게 「의우도」를 그리게 하고 「의우도서(義牛圖序)」를 지었다. 「의우도서」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의우를 기렸다.
“오호라! 나는 뿔을 가진 동물이 잘 떠받기는 줄 알고 있는데, 소 가운데 건장한 것은 그것을 해낸다. 그러므로 몸은 매우 투박하지만 힘이 아주 세고, 뿔은 대단히 단단하여 떠받으면 심한 상처를 입히게 된다. 비록 호랑이와 표범 사이에 있더라도 그 뿔과 힘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아직까지 소가 호랑이나 표범을 받아서 호랑이나 표범을 죽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이제 이 소는 암소여서 힘도 없고 뿔도 세지 않지만 다만 주인을 지켜 죽음에서 구하려는 정성만으로 제 힘과 뿔의 모자람을 잊어버린 채 죽음을 무릅쓰고 떠받아서 호랑이를 죽이고 주인을 살렸으니 이것만으로도 기특하다.
그 주인이 죽던 날에 미친 듯이 울부짖으면서 먹지도 않고 3일 만에 죽었으니 어찌 이렇게도 열렬함이 충의의 선비보다 못하지 아니할까! 사람은 도덕을 천성으로 가지고 있어서 충의는 고유한 것이지만 드문드문 서책에 실린 것이 100년에 겨우 수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지한 짐승에게 이러한 이치가 있었던가? 저 가축이나 금수가 은혜를 갚은 것이 어찌 한정 되리오마는 이와 같은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는 겉모습만 소이지 안으로는 사람이요, 또 안으로 보통 사람의 마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곧 사람 중에서도 충의의 선비이다.
내가 그 충의를 보니 그것을 소로 여기지 못하겠다. 비록 그렇지만 미물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미물 스스로의 성질이 아니다. 곧 지극한 성덕의 교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3대 성인의 시대에도 듣지 못했던 것이 이제 와서 홀연히 생기니 비단 의우가 가상할 뿐만 아니라 임금의 교화에도 감응이 있다.”
인덕리 의우총 이야기는 『일선지』와 『선산부읍지』에 간략하게 전하고 있고, 이민환(李民寏)의 「의우총병서(義牛塚竝序)」(『자암선생문집(紫巖先生文集)』 소재)에도 전하고 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봉분과 비가 훼손되어 있던 것을 1993년 『의열도(義烈圖)』에 있는 「의우도」 8폭을 화강암에 조각하여 봉분 뒤에 세우고 일대를 정비하여 의우를 기리고 있다. 봉분의 저변 직경은 2m, 화강암에 새긴 「의우도」의 크기는 가로 6.86m, 세로 0.8m, 너비 0.2m이다.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2. 봉곡동 의우총
구미시 봉곡동에는 또 하나의 의우총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조 때 여양인(麗陽人) 진수발(陳洙發)이란 사람이 부인 밀양박씨와 오순도순 살다가 일찍 죽었다. 과부가 된 박씨는 암소 한 마리를 기르며 가난한 살림을 어렵게 꾸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그 집에서 키우던 암소가 불행하게도 새끼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죽어버렸다. 어미 소를 잃은 송아지의 애처로운 정경은 차마 볼 수 없었으며, 그대로 두면 도저히 살기가 어려워 죽고 말 것만 같았다.
송아지를 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궁리를 하던 박씨는 나물죽을 끓여 자기 손에 발라 송아지가 핥게 하기도 하고, 간혹 보리죽도 먹여 가며 어린 자식 키우듯이 정성스레 길렀다. 송아지가 하도 심히 핥아 손등이 아려오고 나중에는 껍질이 벗겨졌다. 시간이 흘러 송아지가 여물을 먹게 되고,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지나 밭일을 할 수 있는 제법 큰 소가 되었다. 살림에 쪼들리던 박씨는 할 수 없이 개령(開寧, 현 김천시 개령면)에 가서 어느 농부에게 소를 팔았다.
그 뒤 몇 해 지나지 않아 박씨는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박씨의 장례를 지내는 날, 상여가 출발하려고 할 즈음 난데없이 누런 암소 한 마리가 달려와서는 상여 앞에서 눈물을 흘리더니 미친 듯이 부르짖고 날뛰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를 몇 번이나 하다가 드디어 암소는 죽고 말았다. 개령으로 팔려간 그 소가 30리를 단숨에 달려온 것이다. 이를 바라본 동네 사람들은 모두 기특해하고 그 이상함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박씨의 무덤 아래 죽은 소를 장사 지냈다.
1867년 8월에 세운 ‘의우총’이라 새긴 비가 전하고 있는데, 『일선읍지』에는 선산부사 김병우(金炳愚)가 1866년에 비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봉곡동 의우총에 관한 이야기는 『선산부읍지』에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봉곡동 의우총은 원래 구미시 봉곡동 미실 산9번지 선주동사무소 인근에 있었는데, 택지 개발로 근년에 ‘의우총’이라는 비만 지금의 봉곡동 도서관 옆의 양지 바른 자리로 옮겼다.
3. 의우총 더 깊이 알기
소가 주인의 목숨을 구하거나 주인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한 이야기가 의우설화(義牛說話)이고, 의로운 소를 묻은 무덤 즉 의우총은 의우설화의 증거물이 된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의우설화로는 구미시에 전하는 인덕리의 의우설화와 봉곡동의 의우설화, 상주시의 의우설화가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는 「자목상위(牸牧相衛)」, 「우소원(牛訴寃)」, 진정(陳鼎)의 「의우전(義牛傳)」 등이 있다.
의우설화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① 소가 호랑이를 물리쳐 주인을 구한 후 주인이 그 상처로 죽자 따라 죽었다는 투호구주자진형(鬪虎救主自盡型), ② 소가 호랑이와 싸워 주인을 구하고 죽었다는 투호살신구주형(鬪虎殺身救主型), ③ 소가 호랑이와 싸워 주인을 구하고 주인을 해친 무리들을 죽여 주인의 원수를 갚았다는 투호구주보수형(鬪虎救主報讐型), ④ 목동과 암소가 호랑이의 공격을 서로 보호하며 물리쳤다는 투호목자상위형(鬪虎牧牸相衛型), ⑤ 소가 관청에 주인의 원통함을 호소하여 주인을 구했다는 소원관정구주형(訴寃官庭救主型), ⑥ 소가 몸이 변해 샘물이 되어 보은했다는 화신위천보은형(化身爲泉報恩型), ⑦ 소가 옛집에 찾아와 주인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죽었다는 귀소조문자진형(歸巢弔問自盡型), ⑧ 호랑이를 물리친 소가 혼자 달아난 주인을 죽였다는 배은패망형(背恩敗亡型) 등이 있다.
인덕리 의우설화는 소가 호랑이를 물리쳐 주인을 구한 후 주인이 그 상처로 죽자 따라 죽었다는 투호구주자진형에 속하고, 봉곡동 의우설화는 소가 옛집에 찾아와 주인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죽었다는 귀소조문자진형에 속한다.
구미의 의로운 소 이야기와 함께 상주의 의로운 소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상주지』(1989)에 실려 있는 의우설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낙동강변에 권씨 집안이 살고 있었다. 부유한 편은 아니었으나 슬하에 외아들 상복이를 둔 단란한 가정이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집에서 부리던 암소가 새끼를 낳았다. 송아지를 낳은 일이 권씨 내외에게도 기뻤지만 열 살이 넘은 상복이에게는 더욱 기뻤다. 그 후, 송아지를 몰고 밖에 나가 노는 것이 상복이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송아지에게 정신이 팔린 상복이게 부모는 우선 공부를 해서 가문을 빛내는 일이 급선무라고 타일렀으나 상복이의 정신은 송아지에게 더 있었다. 부모는 외동아들인지라 강경하게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송아지는 어느덧 자라서 황소로 변했고, 상복이는 서당에 갈 때마다 소를 타고 다녔다. 서당이 파할 시간이 되면 황소는 미리 서당 안으로 나올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상복이는 서당에서 늦게 귀가하게 되었다. 물론 상복이는 그 황소를 타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들판을 지나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대호(大虎) 한 마리가 나타났다. 상복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소잔등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호랑이가 돌진해 왔고 황소 역시 호랑이에게 달려들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정신을 잃었던 상복이가 눈을 떴을 때는 두 짐승의 격렬한 싸움이 끝나 있었다.
대호는 황소 뿔에 찔려 죽어 있었고 황소 역시 심한 상처를 입어 숨이 경각의 지경에 있었다. 상복이는 눈물을 흘리며 피투성이가 된 황소를 한동안 쓰다듬다가 집으로 달려갔다. 이 사실을 들은 부모와 동민들이 현장에 달려갔다. 모여 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질렀다. “보통 소가 아니구만!” 권씨 부부는 의로운 소를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소를 묻어 주고 그 앞에 ‘의우총’이란 비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