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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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德里 |
영어음역 | Indeok-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귀남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교동(舊校洞, 일명 생골·행교골), 용인동(龍仁洞, 일명 용지골), 기복동(起卜洞), 문수동(文殊洞), 헌덕동(獻德洞, 일명 헌디기) 각 일부를 병합하고 용인과 헌덕의 이름을 따서 인덕동이라 하였다. 구교동은 옛날 향교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생원들이 많이 살아서 생골이라고도 하였다. 용인동은 마을에 용의 굴이 있고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 모두 어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복동은 마을이 생길 당시 복술가의 도움을 받아 터를 잡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수동은 양성이씨(陽城李氏)의 선조가 어명을 받고 지금의 의성으로 간다는 것이 길을 잘못 들어 산세가 좋은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 의성의 옛 이름인 문수라고 하였다. 헌덕동은 뒷산의 모습이 선인(仙人)이 부채를 거꾸로 드리운 형상이며 덕을 드리는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교동(일명 향교앞)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향교는 현재 산동초등학교를 가리킨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선산군 몽대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교동·용인동·기복동·문수동·헌덕동 각 일부를 병합하여 인덕동이라 하고 선산군 산동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구미시와 선산군 통합으로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서북쪽으로 도중천이 흐르고 남쪽으로 성수천을 사이에 두고 야합소들과 통샘들이 펼쳐져 있으며, 북쪽에는 문수지(文殊池)와 인덕저수지가 있다.
[현황]
산동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2007년 8월 1일 현재 면적은 5.50㎢이며, 총 228가구에 471명[남 261명, 여 21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김해김씨, 나주정씨, 강릉유씨, 양성이씨 등이 많이 거주한다. 동쪽으로 장천면 상림리, 서쪽으로 적림리, 남쪽으로 신당리와 봉산리, 북쪽으로 동곡리와 접하며, 마을 동쪽으로 국도 25호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새마 서쪽에는 문수교와 인덕교가 있다.
주민 대다수가 벼농사를 지으며, 특산물로 참외를 재배한다. 예전에는 농가의 80% 이상이 참외를 재배하였으나 현재는 8가구만 재배하고 있다. 2012년까지 옥계동, 신당리, 적림리, 성수리, 인덕2리 일대에 구미4공단 배후 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교육기관으로 경운대학교와 산동초등학교(7학급, 112명)가 있고, 마을 편의 시설로 마을 회관과 공동 창고가 있다. 그 밖에 산동버스터미널, 선산컨트리클럽, M&T전자 등이 있다.
유적으로는 의우총(義牛塚,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6호), 인덕리 폐탑, 이훈(李薰)의 효행을 기리는 효사정(孝思亭), 문수사, 월정(月庭) 황국단(黃國端) 기념비 등이 있다. 명소로 문수산 아래 얼음왕굴이라 불리는 빙혈(氷穴, 어름골)이 있다.
마을에 전해 오는 전설에 따르면, 문수점(文殊店)에 살던 김기년(金起年)이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느 해 여름 밭을 갈고 있을 때 갑자기 숲 속에서 사나운 호랑이가 뛰어나와 덤벼들자 소가 뿔로 호랑이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김기년은 목숨을 건졌으나 상처가 덧나 며칠 뒤 죽었는데, 자신이 살게 된 것이 모두 소의 덕분이므로 소가 죽으면 자신의 무덤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주인이 죽은 뒤 소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3일 만에 죽자 마을 사람들이 주인의 유언대로 소의 무덤을 만들었다.
당시 선산부사로 있던 조찬한(趙纘韓)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1630년(인조 7) 의우전(義牛傳)을 기록하고 비를 세웠으며, 1685년(숙종 11) 화공이 의우도(義牛圖) 8폭을 남겼다. 관리 소홀로 봉분과 비가 훼손되어 있던 것을 1993년 의열도(義烈圖)에 있는 그림 8폭을 화강암에 확대 조각하여 봉분 뒤에 세우고, 봉분을 말끔히 정비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미륵과 탑을 넘어뜨리고 보물을 훔쳐 가면서 한국의 토속 종교는 미신이라는 선전을 하였으며, 기독교를 전파하러 왔다는 선교사 일당이 미륵당 앞의 미륵을 넘어뜨리고 기단에 있던 물건을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