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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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平尹氏 |
영어의미역 | Haepyeong Yu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집필자 | 김명자 |
집성촌 |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면 소매리|충청남도 청양군 적곡면 미당리|황해도 금찬군 고동면 덕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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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시조 | 윤군정(尹君正) |
[정의]
윤군정을 시조로 하는 경상북도 구미시 세거 성씨.
[연원]
시조 윤군정(尹君正)은 고려 고종과 원종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공부판사(工部判事)를 지냈다. 손자 윤석(尹碩)은 고려 충숙왕 때 충근절의동덕찬화보정공신·벽상삼중대광으로서 도첨의사·우의정·판전리사사를 지냈으며 해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해평을 본관으로 하였다. 윤군정의 증손대에서 문영공파(文英公派: 尹之賢)와 충간공파(忠簡公派: 尹之彪)로 갈라진다.
조선시대에 해평윤씨가 배출한 상신 6명과 문형 3명 중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은보(尹殷輔)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승훈(尹承勳)만이 문영공파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충간공파에서 나왔다. 충간공파에서도 선조 때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후손인 오음공파(梧陰公派)와, 그의 아우로 선조 때 대제학을 지낸 윤근수(尹根壽)의 후손인 월정공파(月汀公派)의 양 파가 번창하여 해평윤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윤두수의 다섯 아들 윤방(尹昉)·윤흔(尹昕)·윤휘(尹暉)·윤훤(尹暄)·윤오(尹旿) 등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윤방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냄으로써 부자 영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윤방은 도승지·한성판윤·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여 은퇴하였다가 인조반정 후에 예조판서에 등용되고, 이어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냈다.
윤흔은 우승지에 이르렀으나 계축옥사로 파직되었다가, 역시 인조반정 뒤 예조참판·중추부지사 등을 지냈다. 윤휘는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고, 적진을 왕래하면서 화의를 교섭하였고, 뒤에 형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또 윤훤은 병조판서, 윤오는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오음공파에서 뛰어난 인물을 살펴보면, 치천공파(稚川公派)인 윤방의 아들 윤이지(尹履之)가 돈령부판사를 지냈으며, 윤신지(尹新之)는 선조의 부마로서 시서화(詩書畵)에 능하였다. 윤신지의 아들 윤지(尹墀)가 이조참판, 윤지의 5세손 윤명렬(尹命烈)도 이조참판, 윤명렬의 아들 윤치희(尹致羲)가 이조판서, 윤치희의 아들 윤용선(尹容善)이 한말 총리대신인 의정(議政)을 지냈다. 윤치희의 조카 윤의선(尹宜善)은 순조의 부마였고, 윤이지의 6세손 윤홍렬(尹弘烈)이 판서를 지냈다. 장주공파(長洲公派)인 윤휘(尹暉)의 손자 윤계와 윤계의 아들 윤세기(尹世紀)가 다 같이 병조판서를 지냈다. 윤세기의 5세손 윤치용(尹致容)은 공조판서, 윤치용의 아우 윤치정(尹致定)은 이조판서, 윤치용의 아들 윤우선(尹宇善)도 이조판서를 지냈다. 윤계의 손자 윤급(尹汲)도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글씨에 뛰어나 윤상서체(尹尙書體)를 이룩하였다. 윤급의 종손 윤시동(尹蓍東)은 정조 때 각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백사공파(白沙公派)인 윤훤의 아들 윤순지(順之)는 예조판서·대제학, 윤훤의 증손 윤유(尹游)는 이조판서, 윤순(尹淳)은 이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을 지냈다. 윤근수는 선조 때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오르고, 부제학·대사헌·형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한편 문영공파의 인물로는 윤은보가 영의정, 윤은보의 종손 윤승길(尹承吉)이 찬성, 그의 아우 윤승훈이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근세 인물로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영의정 윤방의 후손이고, 윤치호(尹致昊)는 윤흔의 8세손이다. 그의 아버지 윤웅렬(尹雄烈)은 한말에 군부대신이었다. 해평윤씨는 1985년의 인구조사에서 22,757명으로,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8,225가구에 2만 63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