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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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士珍 |
영어음역 | Jang Sa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조선 시대 구미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죽정(竹亭) 장잠(張潛), 아버지는 장윤(張崙)이다.
[활동사항]
장사진은 당시의 인동현에서 태어났으며, 현재의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 오천리로 이사했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있어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였으므로 이웃사람들은 의협인(義俠人)이라고 불렀다. 군위향교 교생으로 면학하던 중 임진왜란을 맞아 인동과 군위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섰다. 왜군은 그를 두려워하여 장장군이라고 부르며 장사진 부대가 있는 곳을 침입하지 못하였다. 인동에서 전투하던 중 복병에 포위당하여 적병이 휘두르는 칼에 한쪽 팔이 잘렸으나 다시 외팔로 싸우다가 불행히 순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절충장군수군절도사에 추증되었다. 1753년(영조 29) 군위현감 남태보(南泰普)가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병수리에 고리비(故里碑)를 세워 장사진의 충절을 기렸다. 후세 사람들은 왜승을 포획한 장봉한(張鳳翰), 상주 전투에서 순사한 장홍한(張鴻翰)과 함께 ‘일문삼절(一門三絶)’ 또는 ‘삼의사(三義士)’라고 칭송하였으며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 오천리 인근 주민들이 충렬사(忠烈祠)를 지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