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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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潛 |
영어음역 | Jang Jam |
이칭/별칭 | 호원(浩原),죽정(竹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조선 전기의 구미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원(浩原), 호는 죽정(竹亭).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장맹저(張孟儲), 아버지는 충순위 장적손(張嫡孫), 어머니는 전호군(典護軍) 최한충(崔漢忠)의 딸로 화순최씨(和順崔氏)이다. 후손들이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황상동 일대에 세거함에 따라 훗날 인동장씨 황상파(凰顙派)의 파조가 되었다.
[활동사항]
장잠은 가학으로 글을 익히기 시작하여 1512년(중종 7) 경상도관찰사가 순회할 때 실시한 현시(縣試)에서 「무현금부(無絃琴賦)」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514년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세워 독서하면서 백인걸(白仁傑), 성수침(成守琛) 등과 교류하였다. 또 죽림정사 서편 세심당(洗心塘) 위의 이현암(二賢巖, 현 경상북도 구미시 황상동 소재)에서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부임했던 이언적(李彦迪)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31세부터 본격적으로 『심경(心經)』과 성리서(性理書)를 읽었다. 153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3년 인동장씨 족보를 중수하였으며 기타 족계(族契), 향안(鄕案), 학규(學規) 등을 만들어 마을의 기풍을 세우는데 힘썼다. 1540년 시폐소(時弊疏)에서 초안을 만들었으나 올리지는 않았다.
1545년(인종 1) 성균관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기묘사화(己卯士禍) 희생자의 신원을 위한 소청을 설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역 유생들과 의논한 뒤 상경하여 박근(朴謹)을 소수(疏首)로 상소문을 올려 신설(伸雪)의 명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이기(李芑), 윤원형(尹元衡) 등이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모함하여 죽인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참극을 보고 귀향하였다. 시문집으로 『죽정일고(竹亭逸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구포동 정산(鼎山) 언덕에 있다. 1622년(광해군 14)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묘갈명을 찬술했다. 1692년(숙종 18) 시루봉(현 경상북도 구미시 거의동)에 사당이 건립된 후 여러 번의 이전을 거쳐 1739년(영조 15) 황상동 이현암 동편으로 이건되었다. 장잠의 사당은 1761년(영조 37) 현암서원(賢巖書院)으로 승격되었으나 고종 때 철폐되었다가 1993년 사당으로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