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6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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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영어의미역 | Righteous Army |
이칭/별칭 | 의려(義旅),향병(鄕兵),민병(民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정의]
경상북도 구미 지역에서 국가와 향토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운 민병.
[개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진을 침략하면서 북상하자 구미 선산에서는 노경임(盧景任)을 대장으로 하는 선산향병(善山鄕兵)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들이닥치면서 곧 무너졌다. 그리고 해평 출신 부안현감 고한운(高澣雲)이 군졸과 흩어진 의사들을 모아 금오산성에서 진을 치고 일본군에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그 후 선산부사 정경달(丁景達)이 다시 군민을 모으고 인근 지역 의병들과 합세하여 금오산성에서 항전하여 큰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이 후 선산의병은 각지로 이동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물러나자 선산의 선비들이 의병대를 조직, 종묘와 사직을 보존키 위해 남한산성으로 출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폭설이 내려 출진이 늦어지던 중 인조의 항복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한말에는 을미사변 등과 같은 국변으로 항일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자 선산 지역 유생들도 인근 지역 유생들과 합세하여 3월 10일 김천 장날을 계기로 김산의진(金山義陣)을 일으켰으나 관군의 선제 공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김산은 김천의 옛 지명으로서 오늘날 경상북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김천시 일원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그 후에도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임진왜란과 선산의병]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을 침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선산에서는 즉시 노경임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박수일(朴遂一)이 부대장, 최현(崔晛)이 장서(掌書)가 되어 의병을 조직하고, 격문을 사방에 돌렸다. 격문은 “선산 향병장 노경임은 고을의 모든 백성을 모아 나라의 적과 원수를 토벌하고자 하니 누가 이 큰 뜻이 마음에 없으리요. 노경임 등은 스스로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동지를 규합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니, 성패는 알기 어려우나 직분을 굳게 지킬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 동지는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죽기를 원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군율에 처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노경임이 왕명을 받아 서울로 급히 떠나고, 일본군은 16일 만에 질풍같이 들이닥쳐 남녀노소를 마구 해치니 의병도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선산, 인동, 상주 등지는 일본군의 진격 요충지였기 때문에 적군의 세력이 강하였을 뿐 아니라 노략질도 심하였다.
해평 출신 고응척(高應陟)의 아들 부안현감 고한운(高澣雲)은 선산에 적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졸들을 이끌고 와서 금오산성에 진을 치니 김산, 인동 등지의 선비와 흩어졌던 의병들이 합세하였다. 처음에는 복병으로 여러 번 적군을 격파하여 식량과 가축을 탈환하고 무기 등을 빼앗아 오니 한때 산성 안에서 사기가 높았다. 그러나 금오산은 골이 깊고 요충지이기는 하나 사방이 불과 50리 밖에 안 되므로 개령, 성주 등지의 병력을 집결시킨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성안의 형세는 위급해지고 대장 강순세(康舜世), 유사 허국신(許國臣)이 퇴로를 개척하기 위해 적을 매도하다 쓰러지자 성은 위기에 놓였다.
고한운은 야음을 타고 성을 무사히 탈출하였으나 적군은 금오산성 안팎을 수색하여 남녀노소를 모조리 죽이니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남은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서울로 진격한 주력 부대의 후미를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던 이 지역의 일본군은 공포 작전으로서 금오산성에서 잡은 장졸 60여 명을 선산읍 남문 밖 10여 리에 걸쳐 나뭇가지에 매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고한운이 이 광경을 보고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결사대를 조직해서라도 끝까지 싸우기를 맹세하였다. 고한운은 최현을 만나 다시 의병을 모집하는 방도를 강구하고자 의논하였다. 최현은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인의예지를 배웠지만 무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이때를 당하여 참으로 한심하다. 우선 무기를 구해야 하였으므로 순찰사에게 정문(呈文)을 보냈으나 소식이 없고, 경상우도에는 김성일(金誠一)이 순찰사로 있으면서 의사(義士)가 구름같이 일어났는데 좌도에서는 형세가 그렇지 못하다.” 하면서 고한운으로부터 들은 금오산성의 혈전 분투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이를 순찰사와 경상감사와 도체찰사 등에게 여러 차례 올렸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한운은 복병으로서 적군과 싸웠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하다가 끝내는 병사하고 말았다.
한편, 1592년 4월 25일 상주가 함락되자, 순변사 이일(李鎰)은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당시 선산부사 정경달(丁景達)은 잠시 몸을 피했다가 흩어져 있던 군민을 모아 지략을 겸비한 허설(許說)과 김유일(金惟一)로 하여금 금오산에 진을 치고 싸워 큰 공을 세웠다. 8월에 서산 각암으로 출전하였으며, 9월에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전공을 기리는 서찰을 받았다. 뒤이어 이준(李埈), 이항복(李恒福), 정유길(鄭惟吉) 등이 의병을 일으켜 합세하였다.
10월 15일 선산의병은 상주 죽현으로 옮겨 진지를 구축하고 지형과 지세를 이용한 유격전으로 대적하였다. 10월 17일에는 해평으로 의병을 이동하였다. 11월에는 대둔사로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듬해 2월초에 이준 형제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무등곡에서 적을 격파하고 4월에 금오산 도선굴로 돌아왔다. 5월에 김산에 주둔하였다.
명군이 영남으로 진격하니 각 고을에서 식량을 공급할 의무가 있으나 고을마다 식량이 부족하였다. 서산에 모아 두었던 양곡을 도선굴에 비축하여 두었는데, 이 곡식으로 영남 일부 명군의 군량미로 충당하니 명장 유총병(劉總兵)이 식리장군(識理將軍)이라 하며 치하하는 글과 금빛 부채를 주어 선산의병의 높은 공적을 찬양하였다. 어사 윤경립(尹敬立), 순찰사 김근(金勤)이 선산의병의 전공을 나라에 알려 크게 치하하는 서찰이 왔다. 선산의 의병 활동은 왜군을 위협하여 조령을 경유하는 주력 부대의 진출을 견제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힘이 되었다.
[병자호란과 의병]
1637년 12월에 청군이 대규모로 침입해 오니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옮기어 대항하고 있었다. 이때 선산군민들이 모여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다음해 1월 3일 최현(崔晛)을 대장으로, 김녕(金寧)을 부장(副將)으로 추대하고, 이경절(李景節), 김익, 김선의 등 30여 명이 부장이 되어 의병대의 조직을 완성하였다. 선산부사가 군졸 300여 명과 조총을 포함한 무기를 보급하고 지방의 부호들이 군량을 보급하였으니 박진경(朴晉慶)이 격문을 작성하여 사방으로 돌렸다.
1월 4일에 “대오를 정렬하여 한마음으로 전진하며 명령을 어기지 말고 경동함이 없을 것” 등 군율 10개조를 표시한 깃발을 만들게 하여 이를 선두에 세우고 북으로 향해 진군하였다. 가는 도중에 지방의 선비들과 장졸들이 군량을 휴대하고 의병대에 자진 가담하는 자가 많아 그 수효가 더욱 늘어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하고 결사보국으로 오로지 국왕을 구출하고자 하는 충성뿐이었다.
의병이 문경에 이르렀을 때는 현감이 직접 나와 의병을 맞이하고, 위로하는 주식(酒食)을 제공한 후에 관영과 민가에 투숙케 하였다. 청송부사 최산휘(崔山輝)가 군졸과 함께 군량과 군기를 싣고 가세하여 오고, 며칠 후에는 박진경의 아들 창녕현감 박황(朴滉)이 합류하니 선산의 의병은 수천 명이 되었다. 일행이 10일 밤에 회의를 열어 주력 부대는 조령에 계속 주둔하고 선봉 부대가 남한산성으로 진군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선봉장은 청송부사 최산휘가 맡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선봉 부대는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관리들과 농민들 및 의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에 도착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인조를 남으로 모시고 오도록 하고, 그 사이에 임진왜란 때처럼 서남방 일대에서 관군과 의병이 일어서면 사직을 보존할 수 있음은 물론, 청군을 격퇴할 수 있다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다음 날 아침 출발하려고 하는데 폭설이 계속 내려 일보도 전진할 수 없었다. 눈이 녹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의병대에서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던 전령으로부터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통곡하면서 한탄하는 글을 써서 올리고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한말의 김산의진]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한말 의병이 일어났다. 상주·선산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허위(許蔿), 이기찬(李起燦), 조동석(趙東奭), 강무형(姜懋馨), 양제안(梁濟安), 이기하(李起夏) 등의 인사들이 상주에 모여 창의(倡義)에 대하여 여러 차례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산에서 보낸 의병 격문이 전해졌다. 이리하여 이기찬 등은 유도섭(柳道燮) 일행을 김산에 파견하여, 상주·선산 지역 의병과 김산 지역 의병과의 합세를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김산 지역 인사 중 여중룡, 여영소, 이상설, 이숭주(李崇周), 유도일(柳道一), 최동은(崔東殷), 이문선(李汶先) 등이 상주·선산 지역 인사 허위, 이기찬 등과 김산향교에서 만나 창의에 대하여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선산의 허위가 여영소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공식 제의하였고, 여영소가 이를 승낙함으로써 김산의진(金山義陣)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김산의진은 김산, 상주, 선산, 성주 등의 유생들이 연합하여 3월 중순경 김산향교에서 창의하였다. 이 때 선산 지역의 인사로는 허위, 허겸 등이 참여하였다.
김산의진의 초기 진용은 대장에 이기찬, 중군(中軍)에 김기력(金基櫟), 찬획(贊劃)에 조동석·이용주(李龍周)·강일선(姜馹善)·허겸·이능규(李能圭)·이상설·여중룡, 군관에 강무형·이기하, 종사(從事)에 이숭주·최동은(崔東殷), 참모에 허위·여영소, 군량도감(軍糧都監)에 조석영(曺奭永)·여승동(呂承東)·이현삼(李鉉參)·조남식, 장재관(掌財官)에 배헌(裵憲)·강명숙(姜明淑)·박래환(朴來煥) 등이 취임하였고, ‘예건대장기(禮建大將旗)’와 ‘김산복의대장기(金山伏義大將旗)’ 및 ‘김산창의대장(金山倡義大將)’이라 쓴 대장기를 세웠다.
김산의진은 이처럼 선산, 김산, 상주, 성주 등지의 유생으로 조직된 연합 의진이었는데 곧이어 개편되었다. 즉 대장에 이기찬, 군문도총(軍門都摠)에 조동석, 찬획(贊劃)에 강무형, 참모장에 허위, 서기에 이시좌(李時佐)·여영소, 중군에 양제안, 선봉에 윤홍채(尹鴻采) 등으로 지도부가 개편되었다.
김산의진은 1896년 3월 10일 김천 장날을 이용하여 수백 명의 병사를 모집하여 진세를 보강하고, 먼저 김산 군기고소(軍器庫所)를 점령하여 군기(軍器)를 접수하였다. 그리고 의진을 김산과 성주 2곳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이들 두 진영은 서로 호응하여 대구부 공략을 계획하고, 진세 강화를 위해 각지로 격문을 발송하면서 모병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밀을 사전에 탐지한 대구부 관찰사가 3월 14일 먼저 관군을 출동시켜 성주 진영을 공격해 왔고, 이어서 서울과 공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합세하여 김산 진영을 공격해 왔다. 이때 이은찬과 조동호 등이 체포되고, 김산의진도 패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허위, 여영소 등은 상주, 선산 등지에 통문을 배포하여 창의 초기에 흩어졌던 의병들을 모아 3월 25일 김천 직지사에서 다시 일어났다. 의진은 황간으로 들어갔다가 황계, 상촌 등지를 경유하면서 세력 확장에 노력하였다. 이후 의진은 마산점, 장자동, 임곡, 지례를 지나 4월 3일에 지례 홍심동으로 들어갔다. 군량을 확보하고 군사를 모집하면서 홍심동에 도착하니 군사는 포군이 100여 명, 유생이 70~80명 정도였다. 이처럼 의병진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였으므로 부의장에 이주필(李周弼), 우익장(右翼將)에 이성백(李性伯), 도집례(都執禮)에 유인목(柳寅睦), 운량도감(運糧都監)에 조석영(曺奭永)을 추대하는 등 부대 조직을 다시 정비하였다.
김산의진은 4월 5일 대구부 관군이 구성으로 추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의진은 전열을 정비하고, 대장 이기찬과 중군 양제안이 각기 수백 명의 의군(義軍)을 지휘하여 여성면 도곡리로 이동하였다. 결국 김산의진은 대구부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었고, 의군의 지도부는 관군과는 같은 동포라는 견지에서 효유문(曉諭文)을 발송하는 등의 방법으로 접전을 피하려 노력하였으나, 관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도부는 당시 호서 지방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에 합류할 것을 논의한 후, 곧바로 북상하였다. 그리고 허위 등은 진천 방면으로 나아가던 중 근신(近臣) 전경운(田慶雲)을 통한 고종의 선유밀서(宣諭密書)를 받고 해산하였다.
김산의진은 1896년 3월부터 5월까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그 결과 의진의 지도부를 구성했던 인사들 중 일부는 전사하거나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재기를 도모하면서 잠적해 갔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던 때를 전후하여, 다시 의병 지도자로서 또는 계몽 운동가로서 재기하였다.
특히 허위는 중추원의관, 의정부참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부 고관으로서 다양하게 국권 회복 방안을 강구하여 고종 황제에게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한일협약이 강제된 직후인 1904년 5월에는 최익현 등과 더불어 의병 격문을 작성 배포하였다가 체포되어 일본군 사령부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또 허위는 군대 해산 이후에는 ‘13도 창의대’의 총대장 이인영과 함께 군사장으로서 서울 탈환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이 작전이 성공하지 못하자 다시 임진강 유역을 근거지로 항일 유격전을 계속 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구미 지역에서는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나라와 향토를 구하기 위해 수십, 수백의 의사들이 신명을 받쳐 일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 때의 선산의병, 1636년 병자호란 때의 의병, 1895년 한말의 김산의진이 특히 그러하다. 그 가운데서 김산의진은 의의나 성격 면에서 주목되는 바가 많다.
첫째, 김산의진의 항쟁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항쟁한 반침략 운동이었으며, 정부의 개화정책에 항거한 반개화 운동이었다. 둘째, 김산의진은 경상북도 중서부 지방의 의병 연합 부대였으며, 의진 지도부는 유생들이었으나, 병사들은 포군(砲軍)을 주력으로 하였다. 셋째, 김산의진은 경상도 관찰부 소재지인 대구부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대구부는 개화 정책 추진의 한 거점 지역이었다. 당시 경상도 지역의 의병 부대 가운데서도 대구부 공략을 시도한 것은 김산의진이 처음이었다. 넷째, 김산의진의 지도부 인사들 가운데에는 을사조약 이후의 중기 의병이나 또는 계몽운동으로 재기하여 이를 주도한 인사들이 많았다. 이리하여 김산의진은 을사조약 이후에 전개되는 국권 수호 운동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산의진에는 한계점도 많았다. 김산의진이 활동한 시기는 2개월 정도에 불과하였고 제대로 된 항쟁을 펴보지도 못하였다. 그 이유의 첫째는 의진의 지도부가 통일적인 지도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김산의진이 선산을 비롯한 각지 인사들의 연합 의진이었던 만큼 각지 인사들 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결집력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지도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둘째는 김산의진은 시기적으로 늦게 결성됨으로써 전국적 봉기라는 시기에 편승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김산의진이 조직되던 시기는 전국적으로 의병 진영들이 이미 해산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의병 부대의 지원이나 일반 민중들의 협조를 기대하기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셋째는 김산의진은 조직적인 지도 원리를 결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지도부의 전술·전략이나 병사들에 대한 훈련 등이 미숙하였고, 항전 태세도 미비한 상태에서 관군의 선제 공격을 받자 흩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유생들이 주도하는 의병 부대의 공통적인 한계점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