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009
한자 義城大堤池
이칭/별칭 대제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형기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丹北面)에 있었던 삼한 시대의 저수지.

[개설]

대제지는 우리나라 수리 관개 농업의 초기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저수지로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에 위치하였다.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청동기 시대에 그 기원이 밝혀지고 있으나, 커다란 저수지를 축조하는 데 노동력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발전은 초기 국가들이 등장하는 때와 맞물리는 기원 전후한 시기에 가능했다고 짐작된다. 이 시기에 상주 공검지(恭儉池), 김제 벽골제(碧骨堤), 밀양 수산제(守山堤), 제천 의림지(義林池) 등과 함께 의성 지역에 대제지가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리 사업을 통해 천수답 및 수리 불안전답을 수리 안전답으로 전환하여 토지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수도작(水稻作)을 주축으로 하는 농업 구조 하에서는, 농경지의 생산성을 높이고 한해·수해가 없는 영농을 위한 농업용수·배수 시설 등의 생산 기반을 조정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과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의성 지역에 대제지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 당시 의성 지역에서 농경이 상당한 수준까지 발달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저수지의 축조 배경 : 벼농사의 시작]

삼한(三韓)은 한반도 중부 이남에 분포했던 소국의 연맹으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말한다. 고조선이 발전하고 있을 때 한강 이남에는 진(辰)이라고 불리는 사회가 있었는데 고조선의 많은 유이민이 발달된 철기 문화를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와 진의 토착 문화와 합쳐지면서 마한, 진한, 변한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마한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목지국(目支國), 백제국(伯濟國) 등의 54개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 대국은 만여호, 소국은 수천호로, 총 10여 만호가 있었다고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에 전하고 있으며, 목지국 진왕(辰王)이 다스렸다. 진한은 대구·경주 지역 등 낙동강 동쪽에 사로국(斯盧國)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변한은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낙동강 서쪽에 구야국(狗邪國)[현 김해], 안야국(安邪國)[현 함안] 등 12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삼한 소국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읍차(邑借), 험측(險側), 번예(樊濊) 등의 거수(渠帥)들이었다.

삼한은 정치와 제사가 분리된 사회였다. 정치를 맡은 군장들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신지, 읍차로 불렸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한편 제사를 맡은 제사장인 천군은 소도라는 신성 지역을 다스렸다. 이 소도에는 정치적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으며 죄인이라도 이곳으로 도망하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풍속으로는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과 추수가 끝난 10월에 제천 행사를 하였다. 이는 봄에 풍년을 빌고 가을에 추수를 감사하는 행사로서, 오늘날까지 5월 단오와 10월 상달 고사의 풍속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삼한은 하나의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소국들의 연맹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후에 여러 소국 중에 한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던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여 백제를 탄생시켰고 낙동강 유역에서는 가야국이,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각각 가야 연맹체와 신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가 널리 행해졌다. 밭갈이에 가축을 이용할 줄 알았으며 저수지도 만들었다.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 상주 공검지, 의성 대제지 등은 이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수리 사업이 농업 경제상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이유는 천수답 및 수리 불안전답을 수리 안전답으로 전환함으로써 토지 생산성을 높인다는 데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수도작(水稻作)을 주축으로 하는 농업 구조 하에서는, 농경지의 생산성을 높이고 한해·수해가 없는 영농을 위한 농업용수·배수 시설 등의 생산 기반을 조정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국가 과제였던 것이다. 김해의 패총 등에서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되는 것으로 벼농사가 행하여졌음을 잘 알 수 있다.

[저수지의 축조와 개량]

경상도 지역에는 15세기까지 곳곳에 많은 관개용 저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제(大堤)’란 그 가운데서도 규모가 큰 것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옛 기록에는 전국 각지에 대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살펴보면 경상도에는 대제를 포함한 여러 제언(堤堰)[댐]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외에 규모가 표시되지 않은 제언으로 대구의 성당(聖堂)·불상(佛上)·둔동(屯洞)·부제(釜堤), 성주의 동정자제(東亭子堤)·소비곡제(所非谷堤)·극지제(極只堤)·죽제(竹堤)·소리제(所里堤)·사라제(沙羅堤) 등이 있었다.

이들 저수지의 축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33년(다루왕 6) 2월에 영을 내려서 나라의 남쪽 고을에 비로소 벼농사를 짓게 하였다[多婁王 六年 二月 下令 國南州郡 始作稻田]”와 “222년(구수왕 9) 봄 2월에 백성들에게 남택에 벼농사를 짓도록 명하였다[仇首王 九年 春二月 命國人 稻田於南澤]”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본기에는 “144년(일성왕 11) 봄 2월, 명을 내려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며 먹는 것만이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바라면서 여러 고을에 제방을 수리하고 전야를 넓히라고 하였다[逸聖王 十一年 春二月 下令 農者政本 食唯民天 諸州郡 修完堤防 廣闢田野]”와 “눌지왕 13년(429년)에 새로 시제를 쌓으니 언덕의 길이가 2,170보였다[訥祗王 十三年 新築矢堤 岸長 二千一百七十步]” 및 “531년(법흥왕 18년) 봄 3월 유사에게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法興王 十八年 春三月 命有司 修理堤防]” 등의 기록이 있다. 이들을 통해 볼 때 당시에는 제방을 세우는 일을 권농 정책의 지표로 할 정도로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초기부터 토지 국유제의 확립을 도모함과 아울러 농경지의 개간에 주력하는 등 농업 진흥에 힘썼다. 1143년(인종 21)에는 옛날의 제방을 새로 수축하였으며, 1188년(명종 18)에는 농업을 권하고 제방을 수축하는 시책이 펼쳐졌다. 1248년(고종 35)에는 안주(安州)에 제방을 쌓고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였으며, 1256년(고종 43년)에는 강화에 제포(梯浦)·와포(瓦浦)·초포(草浦)·이포(狸浦) 등의 제방을 축조하여 각각 좌우 둔전(屯田)을 삼았다. 이는 해면에 대한 간척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수리 사업사상 새로운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는 신라 말기처럼 토지 겸병 현상이 일어나는 등 왕조의 토지 지배권이 몰락해 갔기 때문에, 부역 노동을 통한 수리 사업이 활발할 수 없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농본 정책을 강행하여 국가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으므로, 이와 같은 농업 정책에 따라 수리 사업도 국초부터 활발한 진전을 보였다. 1395년(태조 4)에 주·부·군·현에 권농관을 두어 매년 정기적으로 제언(堤堰)[댐]을 수축하고, 제언에는 목통을 설치하여 급수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수리 진흥 정책은 태종 이후에 더욱 활발히 구현되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3품 이하의 관원들로 하여금 군·현을 순회하면서 수리 관개 방법을 직접 지도함과 동시에 수리 시설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1415년(태종 15)에는 벽골제를 개수하였고, 1419년(세종 1)에는 눌제(訥堤)를 수축하였다. 한편, 성종 대에 와서는 크고 작은 천방 (川防)[하천을 막아 물을 끌어대기 위한 수리시설의 일종] 축조가 널리 이루어졌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성종 때의 수리 정책은 이전의 제언저수방법으로부터 천방관개방법으로 중심이 옮겨진 듯하다. 이 밖에 합덕제(合德堤)·남대지(南大池)·수산제 등도 수축되었다. 이처럼 국초에 활발하였던 수리 사업은 연산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중종·명종 대를 지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 난으로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 1700년대의 영조·정조 대에 와서는 문물제도가 재정비되어 감에 따라서 수리사업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여기에서 전후의 복구상황을 살펴보면, 1662년(현종 3년)에 『진휼청제언사목(賑恤廳堤堰事目)』을 발포하여 임진왜란 이후 폐지되었던 제언사를 다시 설치함으로써,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제언의 감사 제도를 부활하였다. 그 뒤 영조 때에는 이것을 비변사 산하로 편입, 강화하였다. 또한 강화도에 제방을 쌓고 옛날의 제방을 다시 수축하는 한편, 낙동강 등의 천방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물론 이러한 수리사업의 대부분은 농민들의 부역·공역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에 따른 농민수탈 등의 폐단도 적지 않았다. 특히 조선 말기에 있었던 동학 농민 전쟁은 고부군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동진강 상류에 있는 만석보(萬石洑)를 신축하고 수세를 과중하게 징수한 데서 발생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당시 수리 사업을 통한 농민 수탈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삼한 때부터 시작된 수리 개발 사업은 삼국·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는 동안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909년의 한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2,780여개 소의 저수지·제언 등의 시설이 있었으며, 한말의 전국 수리 관개 면적은 논의 총면적의 2할 정도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의성 대제지의 축조와 위치]

의성 대제지는 삼한 시대 김제의 벽골제를 비롯하여, 상주 공검지, 영천 아람지,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지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바는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상주목 산천조에 유명한 상주 공검지와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대제지단밀현 북쪽으로 주치로부터 68리 떨어져 있다[大堤池 在丹密縣北距州六十八里]”이다. 즉 지금의 단북면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조사 기록이 없어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단북면 효제리대제 마을 상류에 대제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 사람들은 60여 년 전 농경지 정리 이전만 해도 길이 300m, 높이 50m의 활 모양의 둑이 들판 한 가운데 놓여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둑을 ‘목계’등이라고 불렀으며 이를 대제못의 흔적으로 여기고 있다. 목계는 일종의 수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해 본다. 그 못 둑에서 500m 골짜기로 올라가면 ‘수붓등’이란 곳이 있는데 거기에는 검은 점토가 많다. 이곳은 아마 대제지의 가장 깊은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단북면 노연리 일대에서도 대제지가 이 지역에 있었다는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대제지의 크기는 대략 약 30㏊[30정보] 넓이의 못 둑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길이는 1km가 넘었다. 아래쪽인 서쪽의 둑이 가장 높았고 남쪽과 동쪽으로 가면서 약간씩 낮아져서 북쪽의 제방은 지형에 따라서 유형, 무형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동서로 장방형인 이 못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동쪽 윗부분의 10여 정보를 단북면에서 개답하여 매각하였다. 또한 아래로 20여 정보는 8·15 해방 직전에 개천지(開天池)[개천 저수지]를 증축할 때, 수몰 지구의 농민들에게 대토해서 개답하면서 못 전체가 농토로 조성되었다. 못 아래에 있던 가장 큰 제방(堤防)은 농경지 정리 당시까지도 그 형적이 남아 있었는데, 예전엔 상주(尙州)의 동쪽 끝이었고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어져서, 미끼못의 존재는 이제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단북면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은 곳인 안계면 용기리 앞에는 대제지 유허비 남아 있다. 이 비에 기록된 내용은 단북면 지역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와 크기 등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곳에 대제지의 유허비가 남아 있는 이유는 옛날 사로국이 조문국을 침략한 목적이 금과 쌀의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기록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신라의 의성 지역 복속은 안계 평야의 넓은 들판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확보하고 조령과 이화령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 기지의 확보를 의미한다는 점과 연결된 추정이다. 훗날 신라가 아시촌 소경을 이곳에 둔 배경도 안계 평야의 전략적 특성과 아울러 넓은 들에서 생산되는 곡식 등의 중요성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안계 평야 일대에 대제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기록 등에 나타나는 대제지가 상주목 소속 단밀현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대제지단북면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제지와 관련된 설화]

대제지와 관련해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못자리에 박씨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역모를 꾀하였다가 멸문의 화를 당했고, 그 때 박씨가 살던 자리를 파서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농경지를 조성할 때에는 못의 아랫부분에서 집터의 형적과 기왓장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이 못을 세 번이나 축소 수축하여 왔고, 처음의 크기는 콩을 한 되 볶아서 한걸음에 한 개씩 먹으면서 못을 돌면 거의 다 먹을 만큼이었다고들 하였다. 그러니까 못의 넓이는 만년의 규모에는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컸다는 것이다. 또한 묵계[미끼] 마을 앞에 못 둑이 있었으므로 미끼못이 되었다고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조선 영조 때에 발간된 『상산지(商山誌)』에는 이 못의 주위를 2,416척이라 하였고 금어(金魚)가 살고 순하화(荀荷花)가 핀다고 하였다. 못 이름도 묵지(墨池) 혹은 말계제(末溪堤)라 하였다 기록되어 있다. 이 말계제는 미계제(未溪堤), 즉 미끼제의 오기로 보인다.

1628년(인조 6년)에 뇌성벽력과 폭우가 쏟아지던 밤, 이 못에 살던 큰 이무기가 동쪽으로 갔는데 이무기가 지나간 곳의 진흙 자취는 커다란 대들보를 끌고 가는 듯하였으며 비늘 하나가 떨어진 것이 손바닥만 하여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제지의 현재와 미래]

의성 대제지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의성 지역은 경상북도의 중심지에 위치하면서 선사와 고대 문화부터 불교와 유교 등의 문화 등 다양한 문화들이 공존하면서 발전하였던 곳이다. 이는 경북 최대의 곡창 지대였던 안계 평야가 그 배경이었을 것이다. 안계 평야가 존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대제지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수리 관개 시설이 발달한 지금도 대형 저수지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삼한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대제지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며, 유허비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를 정확한 학술 조사를 거쳐 복원을 하여 제 모습을 찾는다면 역사적인 현장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안** 이병도의 두계잡록에 의해 단밀현에 난미리미동국이 그리고 삼한시대 대제지가 있었던 것으로 비정하게 된 것입니다. 정도백장을 들다보면 알 수 있듯이 대제마을에 큰 제방이 있었음은 분명하나, 이 지역은 일제시대 행정구역 이전에는 다인현 소속이었습니다. 단밀현 지역을 벗어난다면 대제지와는 무관한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한 내용 보완이나 오류 사항 수정이 아닌 경우 수정증보 시 일괄 처리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8.22
안** 대제지는 난미리미동국을 떠나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난미리미동국(단밀현) 범위 안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안계평야에는 30ha 규모의 못이 있었음을 옛 지도와 지적도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정구역으로는 단북면 노연리입니다. 위치 아랫부분을 ‘예전부터 단북면이었던 곳으로 한정해야 할 것이다.’로 수정했으면 합니다.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1.11
김** 다만, 마을 사람들 사이에 단북면 노연리 일대가 대제지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60여 년 전 농경지 정리 이전만 해도 길이 300m, 높이 50m의 활 모양의 둑이 들판 한 가운데 놓여 있었다고 한다.
--- 노연리 일대가 대제지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효제2리 주민들은
60여 년 전 농경지 정리 이전만 해도 길이 300m --로 수정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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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7.19
김** ㅇ 대제지는 엣 고서들을 종합해볼 때 지금의 단북면 대제마을(효제2리)
상류로 추정됩니다.
ㅇ 1623년 계축년(인조) 단밀현 북쪽의 대제는 1592년 임진왜란이후에
제방이 붕괴되어 상주향고 학전으로 사용하다가 1643년 다시수축하여
저수한것으로 모암 조릉선생의 모암집 정도백장 (도백에게올리는 장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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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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