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62
한자 丙子胡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단체 이민성(李民宬)|신적도(申適道)|신달도(申達道)|신열도(申悅道)|권수경(權守經)|김득민(金得民)|김호영(金鎬榮)|이사운(李士雲)|오자립(吳自立)|손창서(孫昌緖)|김결(金潔)|김경발(金慶發)|이사운(李思雲)|이시백(李時白)|김광악(金光岳)|박몽거(朴夢琚)|박효순(朴孝純)|김옥(金鈺)|김협(金鋏)

[정의]

1636년(인조 14)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의병이 일어난 전쟁.

[개설]

조선과 여진과의 관계는 16세기 말까지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1623년(인조1) 반정 이후 집권한 인조와 서인 정권이 이전의 광해군과 달리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내세우게 되면서 후금과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이에 결국 조선은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 두 차례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병자호란과 의병 활동]

병자호란 의 경우 피침 범위가 한강 유역을 넘지 못하여 의성 지역에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성 지역에서는 재지 사족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되어, 조령(鳥嶺)과 쌍령(雙嶺)에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의성 출신 인물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천 이씨 가문의 이민성(李民宬)[1570~1629]은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여 삭직된 인물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종부시 정 겸 사헌부 장령(宗簿寺正兼司憲府掌令)으로 주청사 서장관(奏請使書狀官)에 임명되어 명에 다녀왔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경상좌도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왕세자가 있는 전주의 분조(分朝)에 나아가 군대를 보좌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스승인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고, 후에 병조 참판에 이르렀다.

아주 신씨(鵝洲申氏) 가문에서도 신적도(申適道)[1574~1663], 신달도(申達道)[1576~1631], 신열도(申悅道)[1589~1647] 삼형제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신적도는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전투지로 달려갔으나 이미 종전이 된 후였다. 그 길로 대궐에 나아가 상소를 올리니, 인조가 비답을 내리고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에 제수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쌍령이 이미 함락되고 화의(和議)가 결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행재소로 달려가 임금에게 글을 올려 나라를 판 죄를 아뢰고,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조경(趙絅)과 더불어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후 오랑캐의 속방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미곡[현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에 채미정(採薇亭)을 지어 은거하였다.

신달도는 1627년 봄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임금이 신료들을 모아 놓고 몽진(蒙塵)을 의논하였는데, 신달도는 도성을 굳게 지키고 병사를 이끌고 나가 친히 정벌할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가도(椵島)에 머무르던 명나라 원수 모문룡를 회유하여 잡혀 있던 조선인들을 석방시키고,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형세와 적의 정황을 알아내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신달도는 정묘호란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만오선생문집(晩悟先生文集)』에는 1627년 척화를 주장하다가 청군이 퇴각한 후 올린 「구퇴후진소회소(寇退後陳所懷疏)」, 1627년 올린 「가도봉사시문견계(椵島奉使時聞見啓)」, 정묘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난하였을 때의 일을 기록한 「강도일록(江都日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신열도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서 난을 치르는 고역을 겪었다. 남한산성에서 강화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한 조정의 공의에 반대하여 강화사신을 보내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청물견신사잉자핵계(請勿遣信使仍自劾啓)」가 『나재문집(懶齋文集)』에 전한다.

안동 권씨 가문의 권수경(權守經)[1584~1659]은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장현광의 천거와 함께 마을 사람들의 추대로 의성 의병장 겸 좌도 의병 도유사(義城義兵將兼左道義兵都有司)로서 활약을 펼쳤다. 난이 끝나자 당시 경상좌도 호소사인 정경세(鄭經世)[1563~1633]가 “의성 장수 권수경은 모병과 군량 조달에 전력을 다하고 그 인품이 백 가지 일을 맡겨도 해낼 사람”라는 표(表)를 올려 조정으로부터 공적을 치하 받았다.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도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으나 청과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에 은거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권수경의 활동과 관련된 사적과 서원·향교의 공사 문서 등을 모은 『자락당 선생 실적 변증록(自樂堂 先生 實蹟 辨證錄)』이 순조 연간에 간행되었다.

김해 김씨 가문의 김득민(金得民)[1585~1637]은 아들 김호영(金鎬榮)[1611~1637]과 함께 쌍령에서 적진을 단기로 돌진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다. 소식을 들은 김득민의 부인 의성 김씨도 9일 만에 죽었다고 한다.

의성 김씨 가문의 김엽(金燁)·김욱(金煜)·김찬(金燦) 삼형제도 크게 활약하였다. 이들은 모두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했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거느리고 조령에까지 당도했으나 이미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다시 의병을 모아 쌍령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1769년(정조 20) 이들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정곡사(正谷祠)와 세제단비(歲祭壇碑)가 세워졌다. 이희발(李羲發)[1768~1849]의 『운곡집(雲谷集)』에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삼열사실기(三烈士實記)』가 전한다.

이 밖에 이사운(李士雲), 오자립(吳自立), 손창서(孫昌緖), 김결(金潔), 김경발(金慶發), 이사운(李思雲), 이시백(李時白) 등이 목숨을 잃고, 김광악(金光岳), 박몽거(朴夢琚), 박효순(朴孝純), 김옥(金鈺), 김협(金鋏) 등이 전투에 출전하였다.

[의의]

병자호란 은 지리적으로 의성 지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적 위기에 지역 내의 각 가문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전투에 출전하는 등 투철한 창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d** 지루하게 어렵게하지 말고 딱딱 요약해서 좀 올리라고요.
  •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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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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