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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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春神道碑 |
영어의미역 | Stele for Jeong Chun |
이칭/별칭 | 판관증병조판서충의정공신도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호 |
성격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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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71년 |
관련인물 | 정춘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96㎝ |
너비 | 55㎝ |
소재지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 |
소유자 | 창원정씨 문중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무신 정춘의 신도비.
[위치]
여수시 여천동 여천고등학교 건너편 내동마을 입구 표지석 위 학동 정수장 아래 오른쪽에 사충사 유허비와 함께 있다.
[형태]
원래의 비는 비좌는 존재하지 않으며 가첨석도 한쪽이 완전 박락되고 비신도 박리현상이 심하였다. 비의 높이는 196㎝이고, 너비는 55㎝였다. 이 비는 풍화정도가 너무 심해 비문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비를 세운 기록이나 비문이 발견되지 않아 언제, 누가 어떤 내용의 비문을 지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다. 묘비를 서장척에서 송현으로 옮겨 세우면서 그 훼손의 정도는 더 심해졌다. 묘원이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되어 송현에서 다시 반월 앞으로 옮기던 중 파손되어 부득히 잔해를 매립하였다.
1971년 학동 가곡마을 사충사유허지에 새로 마련된 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후손 채주가 기존 비석의 파손된 석편을 모아 탁본을 하고 여러 문적을 조사하여 엮어서 비문을 다시 지었다. 수년 후 인근 노변으로 이설되었으나 도시계획에 의해 또 다시 철거되었다. 일시 방치되어 있었던 동안 비신과 각자가 손상을 입은 채 현재 정수장 입구 노변으로 이설하여 사충사 유허비와 동시에 개수하였다.
[금석문]
1971년 이전의 비에는 "통정대부성주판관증자헌대부병조판서훈련원사충의정공신도비명병서(通政大夫星州判官贈資憲大夫兵曹判書訓練院事忠毅丁公神道碑銘幷書)"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비문은 후손들이 기존의 비에서 파손된 석편을 모아 탁본하고 문적을 조사하여 1971년에 다시 엮은 비문이다.
[현황]
벽돌로 울타리가 만들어져 있고 철문도 정비가 잘되어 있다. 새로 만든 사충사 유허비와 같은 비각의 사충사 유허비의 향좌에 세웠다. 바로 옆에 학동 정수장의 경비실이 있어서 무단 훼손 등의 위험은 없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예하에서 공을 세워 선무훈일등(宣武勳一等)에 책록된 충의공 정춘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