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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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哲 |
영어음역 | Jeong Cheol |
이칭/별칭 | 사명(士明),청은(靑隱),충절(忠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준옥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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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 |
성별 | 남 |
생년 | 1554년(명종 9) |
몰년 | 1595년(선조 28) |
본관 | 창원 |
대표관직 | 초계군수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활동한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창원. 자는 사명(士明), 호는 청은(靑隱). 성균관사성 정득우(丁得雨)의 7세손으로, 조부는 월천공 정계생(丁戒生)이고, 아버지는 통사랑 정순원(丁舜元)이다. 임진왜란 당시 함께 참여했던 정린(丁麟)은 아우요, 정춘(丁春)은 종제(從弟), 정대수(丁大水)는 종질(從姪)이다.
[활동사항]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하였다. 수문장으로 재임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철은 즉시 정린·정춘·정대수 등과 만금(萬金)의 재산을 내놓아 의병을 모집하여 좌수영에 투탁하므로 이순신(李舜臣)은 “공의 일문에 의사가 어찌 그렇게 많은가!” 하며 삼군에 자랑하고 쾌거를 격려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진격에 참가하여 우위장(右衛將)으로서 정운(鄭運), 송희립(松希立) 등과 함께 자주 전공을 세웠다.
1593년(선조 26) 순천부사 김언공(金彦恭)과 함께 진주 제석당산성(帝釋堂山城)에 주둔하여 수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이순신의 추천을 받아 초계군수에 제수되었다. 1595년(선조 28) 부산전투에 출전했다가 적탄에 맞아 동생 정린, 조카 정언신과 같은 날 순절하였다. 이러한 사실(史實)이 『공신록(功臣錄)』, 『창의록(倡義錄)』, 『삼강록(三綱錄)』 등에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선무원종훈일등공신(宣武原從勳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1847년(헌종 13) 가곡에 사충사(四忠祠)를 세워 향사하였다. 1862년(철종 13) 병조참판에 증직되고, 1866년(고종 3) 병조판서의 증직과 함께 충절(忠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으로 사충사를 이설하면서 이순신 장군을 주향으로 하고, 정씨사충을 병사(倂祀)하여 오충사를 건립하고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