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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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城靑年會 |
이칭/별칭 | 청년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19년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설립된 청년 운동 단체.
[개설]
의성 청년회는 3·1 운동 이후인 1919년 7월 25일에 의성 지역의 청년·유지층이 지식 계발과 덕육 함양 등을 목표로 하여 결성한 청년 운동 단체이다. 의성 청년회는 1920년 이후 전국에서 우후죽순으로 설립되던 청년회에 비해 훨씬 일찍 결성된 특징을 보였다. 의성 청년회는 청년회 대표단의 명칭을 여타 청년회와는 달리 단장과 부단장으로 사용하였다.
[변천]
1919년 3·1운동 직후 결성된 의성 청년회는 1920년 전반기 의성군의 가장 대표적 사회 단체로 활동하였으나 1920년대 중반 무렵에 활동성이 약화되어 그 뒤 점차 유명무실해진 채 1930년에 접어들어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업무와 활동사항]
의성 청년회는 창립 1주년을 경과하던 1920년 8월 의성 향교 부근에 토지 1,000여 평을 매입해 회관 건축에 착수하고, 부기 야학회를 설치·운영하였다.
1921년 4월 의성 공립 보통학교에서 오달산(吳達山)의 사회로 제3회 정기 총회를 개최하고, 청년회의 활동을 점검하였다. 이때 의성 청년회는 지역 사회의 교육 운동에 진력하기로 결의하였다. 노동 야학회를 설치하자 무려 300여 명이 몰렸고, 수용 시설이 부족해 청년 회관이 건립될 때까지 200여 명을 선발해 야학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1923년 3월 서울에서 청년 운동의 방향을 문화 계몽에서 계급 투쟁의 노선으로 전환하기 위해 열린 전 조선 청년당 대회에 주최 단체로 참여하였다. 이후 1926년에도 의성 청년회는 지역의 대표적 청년 단체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회관 건립은 계획과 달리 지연되고 있었다.
[현황]
의성군에서는 의성 청년회 외에도 의성 불교 청년회, 을축 청년회, 소남 청년회, 산운 용남 청년회 등이 결성되었다. 그렇지만 의성군의 청년 운동은 경상북도 지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지역을 단위로 한 청년 연맹 또는 청년 동맹의 결성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이는 의성군의 사회 운동이 여타 지역에 비해 활동성이 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1927년 민족 협동 전선 운동으로 신간회가 창립될 때, 의성 지역에 신간회 지회가 설립되지 않은 것과도 연관된다.
[의의와 평가]
의성 청년회는 전국의 여타 청년회에 비해 상당히 일찍 결성되면서, 1920년대 전반기까지 지역에서 교육 운동을 중심으로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의성 청년회의 역량을 지속적으로 확대시키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