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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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 |
이칭/별칭 | 민족 해방,해방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한말·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 운동.
[개설]
외세의 조선 침탈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비롯된 반제 자주화 투쟁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한 항일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항일 독립 운동은 강제 병합 이전의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 등 양대 흐름으로 전개되었고, 병합 이후에는 새로운 독립 운동의 이념 수용에 따른 민족 대 사회주의의 양대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국외에서 무장 투쟁 노선에 입각한 독립 전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여 새로운 국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민족 통일 전선을 구축하고, 이를 위해 국내외 운동 세력 간의 긴밀한 협조 관계를 조성해 나갔다.
[의성의 항일 독립 운동]
의성 지역의 독립 운동은 국권 회복과 독립을 쟁취하여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기 위한 노력과 독립을 통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의성 지역 의병 항쟁은 1차 의병인 을미의병과 3차 의병인 정미의병 등 두 단계에 집중되었다. 전자는 의성군 점곡면·사곡면에서 전개되었다. 후자는 팔공산에 기병했다가 산남 의진에서 활동한 박연백, 이강년 부대에서 활약한 의성 인사들이 있었다. 또 정미의병 시기인 1907년과 1908년에 걸쳐 3차례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1910년대 의성 지역의 3·1 운동은 지역에서 벌어진 독립 운동 중 가장 강렬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12일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의거로 시작된 의성군의 독립 만세 운동은 안평면·봉양면·점곡면·신평면·가음면·춘산면 등지로 확산되면서 4월 초까지 계속 전개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시위가 군내 약 20여 차례 전개되자 일제 경찰은 발포 등 강경 진압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가 사망하는 피해가 발생할 정도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3·1 운동에 영향을 받아 의성 지역 유림 세력도 독립 청원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동시에 국외 무장 투쟁 세력과 연계한 군자금 모집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20년대 이후 의성에서는 의성 청년회 등 청년 운동, 안평 농민 조합 운동, 형평 운동 등 대중 운동이 일어나 교육 활동, 소작농의 경제적 이익 운동, 신분 해방 운동 등 다방면에 걸친 다양한 사회 활동이 이루어졌다. 또 1930년대에는 의성 적색 독서회·의성 적색 농민 조합 등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과 함께, 신사 참배 거부 운동 등 일제 강점기 말 황국 신민화 정책에 저항하는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의의]
의성 지역의 독립 운동은 경상북도 지역 독립 운동 역량 강화에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 운동에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독립 운동의 고장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