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74
한자 近代
이칭/별칭 한말,일제 시대,개항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개항 이후 해방에 이르기까지 의성 지역의 역사.

[의성의 행정 구역]

근대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행정 구역은 갑오개혁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개편되었다. 1895년 음력 윤 5월 1일에 과거의 현령을 군수로 고치고 경상북도 의성군과 비안군으로 개편하였으며, 안동 관찰부 관할이 되었다. 1896년 8월 4일에는 이를 고쳐 의성군과 비안군으로 개편하였다. 1906년 경상북도 상주군의 단밀면·단동면·단북면·단남면을 비안군에 편입하였고, 1907년에는 비안군 외북면을 의성군에, 1909년에는 의성군 우곡면을 비안군에 편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경상북도 예천군에 편입된 현서면을 제외한 비안군 일원과 용궁군 신하면을 의성군에 편입하였다. 1934년 4월 1일에는 산운면과 조문면을 금성면으로 합하였다. 이런 행정 구역의 변화 과정을 거쳐 1936년 의성군의 행정 구역이 18개 면 182개 동으로 짜여졌다. 18개 면은 의성면·단촌면·점곡면·옥산면·사곡면·춘산면·가음면·산운면·조문면·봉양면·북안면·귀천면·단밀면·단북면·안계면·다인면·신평면·안평면 등이었다. 1940년 11월 1일에는 의성면을 의성읍으로 승격하였고, 1읍 16면으로 구성되었다.

[의성군의 개관]

의성군은 경상북도 지역의 중심인 대구와 경상북도 북부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이다. 의성 지역은 행정 구역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는 특징이 있다. 동쪽은 산간 지대가 많아 특용 작물 재배가 많고, 서쪽은 낙동강을 배경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벼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의성 지역에 대한 일제의 통치는 을사조약 이후 1906년 10월 19일 경무 고문 안동 분견소 의성 분파소가 설치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07년 11월 1일 관제 개혁에 따라 안동 경무서 의성 분파소로 개칭되고, 1908년 7월 안동 경찰서 의성 순사 주재소로 바뀌었다. 다시 다음해 1909년 11월 의성 순사 주재소가 의성 경찰서로 승격되었고, 의성 경찰서는 옛 의성군 외에도 비안군·군위군·의흥군 등 3개 군을 관할하였다. 1910년 7월에는 의성군 일원, 비안군의 40개 면, 안동군의 2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1년 11월 의성군과 비안군을 통합해 의성군이 됨으로써 이 전체를 통할하기 위하여 1936년 16개의 주재소를 두고, 80여 명의 경찰관을 두었다. 또한 의성군에 대구 지방 법원 지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의성군의 교육 기관은 1936년 공립 소학교 2개[의성·안계], 공립 보통학교 10개 등 초등 교육 기관만이 운영되었다. 일제 강점기 의성군의 산업은 농업이 중심이었고, 그중에서도 면작의 주산지였다. 의성의 금융 조합은 의성 금융 조합·안계 금융 조합·도리원 금융 조합 등 3개가 운영되었다. 의성의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1928년에 설립된 의성 양조 주식 회사와 1929년에 설립된 의성 국자 조합을 들 수 있다. 의성의 교통으로는 대구와 안동을 잇는 구안 도로를 비롯하여, 의성-군위, 의성-영천, 의성-청송, 의성-화목 간 도로가 건설되어 있었고, 이를 제외하고는 자동차의 운행이 쉽지 않았다. 의성과 대구를 운행하는 교통은 1916년 3월 최초로 개통되었으며, 하루 한 번 왕복 운행하였다. 1920년 4월부터는 교통이 증설되어 하루에 두 번 왕복 운행되었다.

일제 말 전시 체제기에 조선 총독부는 조선인을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해 국민 정신 총동원 연맹을 조직하였다. 이 연맹의 의성군 조직을 보면, 부락 연맹은 419개, 애국반은 1,937개, 애국반원은 2만 699명이었다.

[의성군의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

근대 의성 지역에서는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 후기 동학 농민 전쟁이 경상북도 북부 지역을 뒤덮고, 농민 전쟁의 의미를 계승한 의병 항쟁이 벌어질 때, 의성 지역에서는 의병 항쟁의 초기에 해당하는 을미 의병과 의병 전쟁기라 평가되는 정미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다.

계몽 운동기에도 ‘흥학설교(興學設校)’의 계몽 운동 방략에 따라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에 1910년 7월 사립 의성 보통학교, 같은 해 12월 사립 기독 계신 소학교 등이 설립되어, 근대 교육이 실행되었다.

[일제 강점기 의성군의 독립 운동]

일제 강점기에 의성 지역에서 발생한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은 일제의 지배에 맞서 일어난 3·1 운동이었다. 의성 지역 대중들의 저항 의지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폭발하였던 것이다. 의성 지역 사람들의 민족 독립에 대한 의지는 유림들의 ‘파리 장서 운동’을 통해서도 이어졌으며, 국외 무장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도 나타났다.

일제의 지배 정책이 무단 통치에서 기만적인 문화 통치로 전환한 1920년대 이후 의성 지역에서는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청년 운동과 농민 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 일제의 정책에 따른 농촌의 몰락이 가속화될 때,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면서 농민들의 주체적 삶을 위한 농민 운동이 안계면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의성읍에서는 적색 독서회가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농지의 규모가 큰 안계면에서는 적색 농민 조합 운동이 일어나 토지 문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건은 1920년대 중반 가음면 주민들이 벌인 가음면장 불신임 운동과 단촌면의 신임 면장 반대 운동이었다. 가음면의 경우 주민들이 면민 대회를 열어 면장의 비행 사실을 적발하여 불신임 운동을 벌였던 것이고, 단촌면의 경우는 김필주 면장의 사임 이후 새 면장을 단촌면 출신으로 해 줄 것을 도 당국에 진정하는 움직임이었다. 이처럼 의성 군민들은 비행 면장에 대한 불신임을 비롯하여 면장 임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주체적인 활동을 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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