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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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容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11월 17일 - 배용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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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2일 - 배용석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독립 만세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5일 - 배용석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 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11월 25일 - 배용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2년 - 배용석 건국 포장 추서 |
출생지 | 배용석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
활동지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3·1운동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배용석(裵容奭)[1890~1938]은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이 주도한 비안면 쌍계동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박영화는 교인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위하여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이날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마을로 돌아오자 교인들과 동민들은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박영화 등이 도로에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자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동리를 시위 행진하였고,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고 해산하였다.
오후 4시에 급보를 받은 의성 경찰서에서는 조선인 경부와 순사 부장을 급히 파견하여 비안 주재소 경찰과 함께 시위 주동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여 모두 18명이 기소되어 형을 받았다. 배용석은 이 시위로 체포되어 1919년 5월 15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룬 후 1919년 11월 15일 출옥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배용석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2010년 의성군 비안면 만세 시위를 기념하는 기념탑과 기념 공원이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