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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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欣伊 |
이칭/별칭 | 이남동(李南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1월 22일 - 이흔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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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 - 이흔이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독립 만세 시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3일 - 이흔이 징역 10월형을 선고 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3월 19일 - 이흔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이흔이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
거주|이주지 |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
활동지 |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흔이(李欣伊)[1879~1940]는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대사동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영수 이종출을 비롯한 교인들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자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오후 7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16일 오후 8시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시위 행진을 한 후 자진 해산하였으며, 3월 17일에는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시위를 시작하여 안평면 마전동·기도동·괴산동을 돌면서 시위 군중 400여 명과 함께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이어 18일 밤에는 300여 명의 시위 군중들과 함께 마전동·기도동·창길동·박곡동·괴산동을 누비며 시위를 벌이고 창길동에 있는 안평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3월 19일 도리원 장날에는 시위 군중 700여 명이 박곡동·석탑동·신월동동을 거쳐 봉양면 도리원 장터로 나아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5월 13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18일 대구 지방 법원 형사 2부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이흔이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