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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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鳳壽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봉수(李鳳壽)[1878~1919]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안평면 대사동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이봉수는 이북술(李北述)의 권유를 받고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은 안평면 마전동·기도동·괴산동을 돌면서 4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창길동의 안평 주재소에 앞에 당도하여 10여 분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시위 군중은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19일에도 도리원 장날을 기해 장터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시위 군중을 규합하여 의성 경찰서로 행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4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안평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 시위를 하였으며, 박곡동·석탑동·신월동을 거치면서 7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봉양면 도리원 장터로 나아갔다.
의성 경찰서는 비안주재소에 출장 중이던 일본 경찰을 도리원 주재소로 급파하고, 도리원 장을 패쇄하고 삼엄한 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처에 이봉수는 이양준·김도식 등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하여 파괴하기로 하고,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몽둥이와 돌을 들고 도리주재소로 몰려가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하였다. 그 과정에 일본 경찰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봉수는 총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총상의 악화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