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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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營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윤영주(尹營柱)[1893~1988]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출신으로, 대구 기독교 성경 학교(基督敎聖經學校)에 재학 중 1919년 3월 8일 대구 시위에 참가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의성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윤영주는 3월 12일 대리동 교회의 신도인 윤용구와 오상룡(吳相龍) 등과 함께 의성읍의 장날인 3월 18일 만세 시위를 하기로 하고 기독교 신도와 의성 공립 보통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했고, 박낙현·윤용구·오상룡 등과 함께 태극기 100여개를 만들고 붉은 글씨로 ‘대한 독립 만세’라 쓴 큰 깃발도 만들었다. 또 같은 교회 신도들과 연락하고 의성 보통학교 후배 재학생 정의진(鄭義鎭)·김덕암(金德岩)·구남술(具南述) 등과 모의하여 학교 인근 공자묘 뒷산에 모이게 한 후, 시장 쪽으로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3월 18일 일본 경찰은 만세 시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아침부터 삼엄한 경계를 펼쳐 시장에서 용의자 15명을 예비 검속하고, 시장을 폐쇄해 버렸다. 윤영주는 오후 3시경 주동 인물들과 함께 두루마기 속에 태극기를 감추고 시장으로 진입하여 군중들에게 나눠주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9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언도 받았고, 4월 25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으며, 5월 22일 고등 법원에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