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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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在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11월 18일 - 박재화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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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1년 말 - 박재화 흥업단에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1월 - 박재화 군자금 모집 활동 중 단원들이 체포되자 은거 |
관련사건 시기/일시 | 1922년 1월 - 박재화 흥업단 군자금 모집 |
몰년 시기/일시 | 1928년 6월 2일 - 박재화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9년 - 박재화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의성군 조문면 대리리 |
거주|이주지 | 의성군 조문면 대리리 |
활동지 | 의성군 조문면 대리리 |
성격 | 국내 항일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흥업단 군자금 모집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재화(朴在華)[1890~1928]는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대리리 출신으로, 1922년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소재 독립군 단체 흥업단(興業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에서 윤세복(尹世復)·김혁(金爀)·김호(金虎) 등의 주도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흥업단의 표면적인 목적은 산업 진흥과 이주민의 친목을 도모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을 위한 독립군 기지 건설에 있었다. 그래서 흥업단은 동삼성(東三省) 일대를 무대로 청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국내로 군자금 모집을 위한 특파원을 파견하였다.
1921년 10월 14일 군비단(軍備團)·광복단(光復團)·태극단(太極團) 등과 함께 대한 국민단(大韓國民團)으로 통합된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 단체로 들어갔다. 흥업단은 1921년 말 군자금 마련을 위해 흥업단장 김호(金虎)가 이만준(李萬俊) 등 4명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밀양·양산·대구를 거점으로 경상남북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거점을 마련하게 된 것은 당시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이 대부분 만주로 망명했고, 그 연고가 고향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함께 활동할 단원을 포섭하였는데, 박재화도 흥업단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박재화를 비롯하여 국내에서 흥업단에 가입한 단원들은 이 지역의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을 시작하였다. 박재화는 권충락(卷忠洛)·홍종락(洪鐘洛)·김종만(金鐘萬) 등과 함께 경상북도 청도(淸道)·영천(永川)·달성(達城) 등지에서 친일 자산가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1월 경, 군자금 모집을 활동 중 홍종락·이재술(李再述) 등이 경상북도 군위(軍威)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포위망이 점차 좁아지자, 박재화는 의성군 금성면(金星面) 학미동(鶴尾洞)에 은둔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9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경상북도 의성군 조문면 대리리 만감정(晩鑑亭) 앞에 「의사 함양 박공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