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8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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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驥善 |
이칭/별칭 | 기운(驥雲),유용(幼用),기서(沂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806년 - 김기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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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35년 - 김기선 사마시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883년 - 김기선 사망 |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
수학|강학지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
수학|강학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
묘소|단소 |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시목촌(柿木村) 앞산 진좌(辰坐)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안동(安東)|상락(上洛) |
대표 관직|경력 | 생원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상락(上洛)]. 자는 유용(幼用), 호는 기서(沂墅). 초명은 기운(驥雲). 김종택(金宗宅)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김양식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 김곤수(金坤壽)의 딸 이고, 부인은 진성 이씨(眞城 李氏) 참봉 이휘양(李彙陽)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기선(金驥善)[1806~1883]은 어려서 종조부인 김기진(金沂進)에게 배우고 이어서 큰아버지 김양정에게 수학하였으며, 성장하여서는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에게 사사하였다. 1835년(헌종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다가 큰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1855년(철종 6)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참사가 있은지 120년이 지나도록 신원(伸寃)하지 못하자, 이휘병(李彙炳)과 함께 영남 사림을 대표하여 신원소를 올렸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이 내리자 김우수(金遇洙)와 함께 대궐문 밖에서 명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였다. 김양범(金養範), 김석유(金奭裕) 등과 강회를 열어 후진을 육성하였다.
1874년 의성 향교가 중건되었을 때 ‘향교 중수기(鄕校 重修記)’를 지었으며, 가뭄이 들때는 지역민을 대표하여 ‘동신 기우문(洞神 祈雨文)’을 짓기도 하였다. 1881년(고종 18)에는 영남 유생들이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추대하고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릴 때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영남 만인소 초(嶺南 萬人疏 草)」를 지었다.
[학문과 저술]
7세손인 김태훈 등이 2권 1책의 『기서문집(沂墅文集)』을 간행하였다. 시 200여 수와 「의척사소(擬斥邪疏)」 등이 실려 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구성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