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학리 산성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725
한자 金鶴里山城址
이칭/별칭 黃山城(황산성),日谿古縣城(일계고현성),城洞(성동),성곡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 산35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신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7년 - 금학리 산성터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실시
관련사항 시기/일시 2004년 - 금학리 산성터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시 지표 조사 실시
현 소재지 금학리 산성터 -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 산35 일원지도보기
성격 산성|산성터
소유자 사유지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에 있는 산성 유적.

[변천]

금학리 산성터 유적의 변천 과정은 조선 시대의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 자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0여 년 전인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의성현 성곽조에는 기록이 없지만 고적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황산성은 현의 동쪽 40리에 있는데 서쪽 석축의 길이가 45척이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고 동, 남, 북쪽은 모두 절벽이다[黃山城 在縣東四十里 西面石築周四十五尺 今廢 東南北皆絶壁]”라고 하였다. 한편 1832년경에 간행된 『경상도읍지(慶尙道 邑誌)』의 의성현지(義城縣誌)에는 황산성(黃山城)에 대한 내용이 이전 기록보다 더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황산성은 현의 동쪽 40리에 있는데 속칭 성동(城洞)이라고도 하며 어느 시대에 축조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동쪽으로부터 남쪽과 북쪽은 큰 산이 절벽을 이루지만 서쪽은 낮고 미미하여 마치 병목과 같은 형상인데, 그 위에 둘레가 45척되는 돌을 쌓아 막아 견고하기가 만 명의 장부도 허물지 못할 정도다[黃山城 在縣東四十里 俗名城洞 不知築於何代 而東南北大山絶壁 西面低微如甁項 石築其上 周回四十五尺 防守之固眞萬夫莫開者也 城內東西七八里 南北僅五里許 其中平行土厚可耕 東山麓有宮基石築頹圮].” 라고 했다. 그리고 성내의 공간은 동서로 7~8리, 남북으로 거의 5리가 되며, 그 가운데는 평평하게 토심이 깊은 곳은 경작이 가능하고, 동쪽 산기슭에는 궁궐터가 있는데 석축이 기울어지고 무너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1871년에 간행된 『영남읍지(嶺南邑誌)』의 의성현지(義城縣誌)에서도 『경상도읍지』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들이 보인다. 다만 1864년경에 간행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저자인 김정호(金正浩)가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타나 있다.

“일계고현성은 동쪽 40리에 있는데 황산성이라 칭하며 동, 남, 북이 절벽에 가깝고 서쪽만 석축을 하였다[日谿古縣城 東四十里 称黃山城 東南北絶壁准 西面石築一百四十五尺]” 라는 내용으로 보아 이전 기록의 황산성이 분명하다. 다만 이전 기록에는 모두 서쪽 성벽의 둘레가 45척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145척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김정호의 착오로 여겨진다.

이상과 같은 문헌 기록으로 볼 때 황산성은 일계고현성(日谿古縣城) 또는 성골성[성동(城洞)]으로도 불렸으며 현재 금학리 산성터를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이미 고적으로 기록되고 있어,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원래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

금학리 산성터 유적은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 산35, 산35-3, 산41-1 일원에 자리하고 있다. 금학리 새고무실 마을의 동쪽으로 난 골짜기에 해당한다. 이 골짜기의 입구는 좁은 편이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교적 넓고 긴 경작지가 있고, 그 끝부분에는 성골 마을이 있다. 이 골짜기는 동북쪽으로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금곡리와 경계를 이루며, 해발 600~700m 정도의 높은 봉우리들로 연결된 능선이 산성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87년 5월~11월 대구 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지표 조사가 있었고, 2004년에는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을 위한 지표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으나 지금까지 발굴 조사는 없었다.

[현황]

계곡 입구에서 약 500m 정도 올라간 위치에서 골짜기를 가로막는 형태로 성벽이 잔존하고 있는데 현존하는 성벽부의 길이는 현재 65m 정도로서, 성벽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곳은 길이 7m, 높이 0.8m, 폭 2m 정도이고 나머지 부분은 허물어진 돌무더기의 형태이다. 그리고 근래의 농로 개설 과정에서 성벽 부분이 많이 파괴되었는데 이 부분이 성문지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금학리 산성터 유적은 의성군에서 가장 동쪽의 산악 지대에 위치한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등의 기록으로 보아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이 산성은 그 유래가 무척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산성 내 가경지(可耕地)가 있다는 점에서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에도 꾸준히 주민이 거주해 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성안의 골짜기는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성골 마을에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