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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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鞠賢男 |
영어음역 | Guk Hyeonnam |
이칭/별칭 | 우경(虞卿),경재(敬齋),국성유(鞠聖喩)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589년 - 국현남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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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67년 - 국현남 졸 |
추모 시기/일시 | 1695년 - 정려 건립 |
출생지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도요동 |
묘소|단소 | 묘소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마룡리 |
사당|배향지 | 정려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담양 |
[정의]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담양. 자는 우경(虞卿), 호는 경재(敬齋). 1729년 정리된 담양 국씨 족보에는 성유(聖喩)로 적혀 있고, 1974년 족보에는 현남(賢男)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에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국여명(鞠汝明)으로, 호는 정숙(靖肅)이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로 유창수(柳昌壽)의 딸이다. 첫 번째 부인은 서령 유씨로 유방택(柳方澤)[류방택]의 후손이다. 두 번째 부인은 평양 조씨로 조정(趙靖)의 딸이다.
[활동 사항]
국현남(鞠賢男)[1589~1667]은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에서 태어났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학식과 덕망을 갖추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하루는 부모에게 드릴 생선을 사서 포구를 빠져나오는데 바닷물이 차올라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트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한번은 한겨울에 아버지가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하였다. 국현남은 수박을 찾아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도비산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마침 부석사 귀퉁이에서 수박을 발견하여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아버지가 나이 들어 귀가 어둡자 종이나 나무껍질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서 모든 일을 상의하고 결정하였다. 이렇게 쓴 기록물은 상자에 차곡차곡 모았다.
국현남에 대한 행적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철(李哲)의 가장(家狀)에도 나온다. 이철은 집이 가난한데다 친족이 모두 어리고 인척도 멀리 살아 도움받을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인지 선대의 산소가 침해당해 관아에 송사를 제기하였으나 잘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스승인 국현남을 찾아가 상의하였더니 억울한 사정은 잘 알지만 때가 좋지 않으니 적당한 시기에 다시 송사하라고 일렀다. 그 후 이철은 혈서를 써서 다시 제소하였다. 이때 국현남이 증인을 서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승소 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12년 간의 산송(山訟)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1646년 5월 23일자 『인조실록(仁祖實錄)』에 따르면 서산 유학 국성유와 그의 아들 국진호가 홍주, 덕산 등지의 한량 및 서얼 10여 명과 역모를 꾀한다는 조시응(趙時應)의 고발이 접수되었다. 조정에서는 금부도사를 파견하여 국현남을 체포하고 집 안을 수색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친히 국성유 등 11명을 신문하였다. 옥에 갇힌 국현남이 늙은 아버지 걱정으로 사흘 간 통곡하니 옥사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버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임금은 국현남이 술수를 부린다고 여겨 집에 있는 문서를 모두 가져와 살피도록 하였다. 그 속에는 귀가 어두운 아버지를 위해 글을 적은 종이와 목편들 외에,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자 하나밖에 없는 흰옷으로 싸서 후원에 묻었다는 글도 있었다. 이에 임금이 감동하여 손수 글을 써서 효자 정려를 내렸다. 아버지가 죽은 뒤 국현남은 좋은 묏자리를 찾아다니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노인이 나타나 좋은 곳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서산군 부석면 마룡리 선영이다.
국현남은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과거 시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성현의 글을 읽고 또 읽어 깊은 뜻을 깨쳤다. 교육에 뜻을 두어 도비산 아래에 집을 짓고 강학의 장으로 삼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수백 명의 제자가 찾아들었다. 국현남은 호서 지방의 덕망 높은 선비로 존경을 받았고,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나왔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국현남의 집이 있었던 도요동을 서당동, 서당골 또는 효자문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묘소]
묘소는 서산시 부석면 마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서산시 부석면 지산리 서당골에 국현남의 효자 정려가 있다. 1646년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혀 있을 때 임금이 국현남의 효행에 감동하여 친히 ‘구충신어효자지문 유여차지행 안유여피지사(求忠臣於孝子之門有如此之行安有如彼之事)’라는 글을 적어 명정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인조 당시에 명정을 받았다고 하나 정려에 걸려 있는 현판에 의하면 정려의 건립 시기는 1695년(숙종 21)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