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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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現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지수걸 |
[정의]
개항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개설]
서산 지역의 근현대사는 개항기,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의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 볼 수 있다.
[개항기]
1876년 개항 이후 궁벽했던 서산에도 개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되었다. 국가 권력의 해체 과정에서 관료들의 수탈과 약탈이 빈번했고, 대외 무역의 확대에 힘입어 만석꾼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다. 인근 태안군 환동 지역[현 태안군 남문리 지역]의 이씨가문 등 서산 지역의 만석꾼들은 개항기에 ‘소금밭’과 ‘벼슬밭’을 일구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서산 사람들은 개항기 전후로 무능한 양반들의 억압과 수탈에 시달렸다.
19세기 들어 서산·태안 지역에는 천주교와 더불어 동학의 교세가 상당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1868년 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들이 희생되고 1894년 농민 전쟁 때 많은 동학교도들이 희생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시기 다른 지역과 달리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군은 봉기를 시작하면서 작두로 군수를 처단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서산·태안 농민이 중심이 된 예포 농민군은 목소 전투, 승전목 전투, 예산산성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성 전투, 매현 전투 등을 치렀다. 1894년 10월 28일과 29일 양일간 전개된 홍주성 전투는 공주 우금티 전투에 버금가는 큰 전투였다. 내포 지역 동학 농민 전쟁은 서산에 소재한 해미성 전투와 매현 전투를 끝으로 종말을 고하였다.
한일 병합 이후 1914년 군·면 폐합 때 서산군은 서산군·태안군·해미군을 통합한 충청남도 최대의 군으로 발전하였다. 통합 직전인 1908년 서산군, 태안군, 해미현의 호구 수는 각각 2만 2322명, 1만 3389명, 2만 385명이다.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개항기 서산·태안 지역에 가장 유명했던 포구는, 성연면 면소재지인 평리 인근의 명천포[창말], 그리고 지곡면 화천리의 원천포와 대산면 삼길리의 삼길포 등이었다.
개항기 서산의 지역 경제를 이끌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제염업이었다. 개항기까지 서산에서 생산된 소금은 충청도 전체 소비량의 70%를 점하였을 뿐 아니라 뱃길로 한양으로도 유통되었다. 서산 지역의 대지주들은 대부분 소금을 굽거나 판매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값싼 ‘기계염’이 보급되기 전까지 소금 한가마 값은 쌀 한가마 값 정도였다고 한다.
1908년 서산, 태안, 해미 지역에는 6개의 교육 기관이 존재하였으며, 학생 수는 대략 165명 정도였다. 서산의 근대 물결은 근대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6년 안면도에 설립된 광영학교(廣英學校)를 비롯하여 서산 읍내의 풍전신숙(豊田新塾)과 서령학교(瑞寧學校), 태안의 화양학교 등은 서산 지역 반일 운동, 반봉건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 강점기]
1914년 군·면 폐합 이전 시기 서산군은 16개 면, 해미현은 9개 면, 태안군은 13개 면을 거느린 독립적인 행정 구역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군·면 폐합을 단행하여 1. 서산군에 속했던 16개 면 전체, 2. 태안군에 속했던 14개 면 중 9개 면[부내면, 남면, 근서면, 원일도면, 원이도면, 북일도면, 북이도면, 동일도면, 동이도면], 3. 해미군에 속했던 9개 면 가운데 6개 면[동면, 남면, 북이도면, 일도면, 염솔면, 서면], 4. 홍성군의 일부 면[고북면 일부]을 통합하여 관할 구역 내에 20개의 면을 거느린 충청남도 최대의 행정 군을 형성하였다.
1917년 조선면제가 실시되면서 서령면이 서산면, 지성면이 해미면으로 개칭되는 것으로 서산 지역 행정 구역 통폐합은 일단락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 구역 체제는 1989년 태안군이 서산군에서 떨어져나가 독립하는 시기까지 그 틀이 유지되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태안과 해미는 일제 강점기 서산군의 한 면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그 나름의 지방색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서산, 태안, 해미 지역에 별도의 신문사 지방 지국이 있었고 각종 시민단체나 사회 운동 단체들이 별도로 조직을 설립하거나 운영한 것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서산 지역은 철도나 1등 국도가 지나지 않았으므로 육지 교통이 불편하였다. 하지만 일찍부터 포구가 발달하여 전근대 시기부터 인천, 군산 등지와의 교통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1920년대 중반 서산 지역에서 가장 번성했던 포구는 팔봉면 호리의 구도포, 성연면 명천리의 명천포, 서산면의 덕지천포, 근흥면 정죽리의 안흥항, 팔봉면 어송리의 창포, 정미면 천의리의 천의포, 해미면 개삼포, 소원면 신덕리의 후포 등이었다. 1928년경부터 명천포에는 예산환(禮山丸)과 녹도환(鹿島丸)이 인천을 정기 운항하고 있었는데, 1932년과 1936년 두 차례나 녹도환이 침몰하여 많은 서산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인천 지역에는 서산·태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국세 조사에 따르면 1930년 서산의 총인구는 14만 5841명이었으며, 인구가 가장 많은 면은 서산면으로 9,795명이었다. 당시 운산면의 인구는 9,670명, 해미면 9,867명, 안면면 9,625명, 태안면 1만 347명 등이었다. 1930년 서산 지역 인구의 직업별 분포를 보면 대부분의 주민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바닷가 마을에 어업 인구가 일부 분포하였다. 인구 비를 보면 상업과 공업 인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공업 인구 가운데 남자의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던 것은 서산군에 염업 노동자가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교통업 인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약간 많은 것은 특별히 교통이 발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해운업[여객선] 종사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개항기 만석꾼으로 성장한 서산 대지주들은 산미 증식 계획 등 일제 강점기의 지주 중심 농업 정책에 편승하여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들은 토지 경영과 더불어 농외 투자도 활발히 전개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서산 지역 대지주와 상공업자 등 이른바 ‘지방 유지’들은 일제 강점기 농회, 금융 조합, 면협의회, 학교평의회 등 각종 ‘공직(公職)’에 진출하여 활발한 ‘유지 정치’를 전개하였다.
서산 지역 유지들은 지역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회나 군민 대회, 혹은 각종 기성회나 후원회를 조직하는 활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서산 지역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민원 사건은 1932년경의 ‘서산지청 이전 반대 투쟁’, 그리고 1930년대 후반의 ‘서산항 건설 및 정기항로 확대 투쟁’ 등이다.
서산 지역에는 지역 유지들처럼 일제 강점기에 타협하는 세력 이외에 일제 강점기에 강력히 저항했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3·1 운동 시기 서산 지역에서만 12건의 만세 시위 운동이 벌어진 것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서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했던 시위는 4월 4일 정미면 소재지인 천의[현 충청남도 당진군]에서 발생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거나 감옥에 갇혔다. 서산 지역의 만세 시위는 서산 주민들, 특히 천도교도나 기독교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정치 시기, 서산 지역에서도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 사회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 소작 쟁의와 야학 운동이 활성화되고, 청년회가 면 단위로 결성되는 등 지역 사회 운동이 활기를 띄었다. 1920년대 후반 팔봉, 운산, 원북, 서산, 태안, 부석, 해미 등지에서 지역유지나 사회단체들이 운영하는 사설강습소나 야학 등이 운영되었다.
1929년 서산에는 소원청년회, 태안조기회, 몽호청년회, 서산노동조합, 형평사 서산지부, 칼톱청년회, 신간회 서산지회, 미호청년회, 청년동맹 서산지부 등이 존재하였다. 이외에 『동아일보』 등 조선어 신문사 지방 지국, 그리고 천도교 청년단이나 기독교 관련 단체들도 서산의 시민 사회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산 지역의 시민 사회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1930년대 이후까지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에 전개된 서산 지역의 청년 운동은 ‘해방’ 공간에서 전개된 자주적 통일 민족 국가 수립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해방 직후 서산 지역에서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대부분 일제하에서 혁신 청년 운동이나 비밀 결사 운동을 주도한 인물, 혹은 그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청년들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 서산 주민들도 일제의 전쟁 동원 정책, 예를 들면 징용이나 징병, 강제 공출이나 저축 등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현대]
해방과 더불어 서산 지역도 커다란 정치적 변화에 직면하였다. 일제 강점기 ‘유지 명부’에 올라 있었던 사람들과 ‘요주의·요시찰인 명부’에 올라있던 사람들의 정치적 지위가 갑작스럽게 뒤바뀌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 ‘불령선인’이니 ‘좌익분자’니 하는 ‘낙인’은 오히려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상징하는 ‘신임장’으로 바뀌었다.
해방 직후에 서산 지역에 나타난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은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이후 ‘인민위원회’로 전환되었는데, 미국은 미군정을 수립하자마자 각지의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고 좌익 세력의 정치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46년에 접어들면서 전국 각지에서는 ‘신탁통치 무조건 반대론’[우익]과 ‘모스크바 삼상회의안의 총체적 지지론’[좌익]을 둘러싼 좌우익간의 다툼이 치열했는데, 이는 서산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 서산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이종만(李鍾萬)[60세]으로 천도교인 이었으며, 청년동맹의 위원장은 김동운(金東雲)[35세]으로 한약상이었고, 부위원장은 김대원(金大遠)[32세]으로 과자상을 운영하였다. 서산 지역의 좌익 세력은 1946년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된 미군정과 우익의 총반격, 특히 1946년 가을에 있었던 이른바 ‘추수 봉기’로 말미암아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였다. 1946년 10월 말 서산에서도 토지의 균등 분배, 쌀의 공정한 분배, 미소공동위원회의 조속한 재개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소요 사태를 야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익 단체로는 독립촉성협의회(獨立促成協議會) 서산지부와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과 같은 우익 청년 단체가 유명하였다.
이 같은 정치 갈등 과정에서 1948년 8월과 9월 결국 남북한에는 각각 ‘상대의 절멸’[북진 통일, 국토 완정]을 공언하는 분단 정부가 수립되었다. 서산 지역에서도 단선 단정 반대 투쟁 과정에서 제헌 의원 선거와 지하 선거[연판장 선거]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해방 공간의 좌우 갈등은 6·25 전쟁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서산 지역의 경우, 전투 과정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으나, 다양한 형태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무수히 발생하였다. 개전 초기 보도 연맹원 학살, 인공 시기 우익 인사 학살, 수복 후 부역자 학살 사건 등은 전쟁 시기에 발생한 커다란 비극이었다. 2004년에 만들어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특별법」에 기초한 진실 규명 결과, 전쟁 시기 좌우익을 막론하고 서산 지역의 정치 명망가들은 대부분 희생되고 말았음이 확인되었다.
전쟁 이후 서산 주민들의 삶은 어려웠다. 1957년 대호지면(大湖芝面)·정미면(貞美面)이 당진면에 이속되고, 1973년에는 태안면이, 그리고 1980년에는 안면면이 읍으로 각각 승격되었으나, 서산 주민들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정책이 서울~대전~대구~부산을 잇는 ‘경부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산 지역은 경제 개발이 실시되는 시기 아무런 개발 혜택도 누리지 못하였다. 다만 천수만과 가로림만 인근의 바다와 개펄과 염전에 의지하여 고단한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까지 서산의 명물은 ‘어리굴젓’ 뿐이었으며, 서산하면 사람들은 ‘갯마을’을 떠올리곤 하였다.
예로부터도 그러하였듯이 서산의 약진은 개간과 간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60~1970년대에도 개간 간척이 많이 이루어졌으나 천수만을 가로막는 서산AB지구방조제의 건설은 규모에 있어서건, 산업이나 생태적인 의미에 있어서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공사였다. 천수만에 서산AB지구방조제가 건설되고 드넓은 간척지에 현대 농장이 들어선 것은 서산 역사상 일대 사건이었다.
그 결과 천수만 일대는 쌀 주산지임과 동시에 철새 도래지가 되었다. 이후 이른바 ‘서해안 시대’를 표방하며 정부가 서해안고속국도를 건설하고, 또 이와 더불어 많은 방조제와 도로, 항구와 공단이 들어서면서 서산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충청남도 대다수 다른 지역들이 매년 인구가 줄어들고 있음에 반해, 서산시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