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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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藝人-匠人-草綠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복 |
[개설]
초록리(草綠里)는 충청남도 서산시의 맨 아래 끝자락인 고북면 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이웃한 장요리와 함께 홍성군 갈산면 대산리에 인접해 있다. 초록리는 조선 후기 판소리 중고제의 명창인 고수관(高壽寬)[1764~1849]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초록리는 18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옹기, 질그릇, 쇠솥 등을 만들어 팔았던 그릇 장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기도 하다.
초록리 사람들은 고수관의 예술혼을 이어받아 신명을 누리며 살아 왔다. 초록리 풍물패는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인근의 장터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였다. 마을에서 경연 대회를 열고 신파극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현재도 매년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에는 연암산 상봉의 각시바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초록리 각시바위제를 지내며 화합을 다진다.
[연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초록리]
홍성에서 해미로 연결되는 국도 29호선을 따라가면 고북면 소재지인 가구리가 나온다. 면사무소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마을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2㎞ 남짓 가면 고수관의 출생지로 알려진 초록리다. 뒤에는 연암산[441m]이 우뚝 솟아 있다. 넓은 들판에는 붉은 황토밭이 펼쳐져 있는데, 전국적으로 이름난 ‘고북 알타리무’의 생산지다. 마을 동쪽에는 서산시 해미면 대곡리와 경계를 이루면서 가야산으로 북진하는 금북정맥의 줄기인 연암산이 있고, 앞으로는 낮은 구릉과 저지대가 펼쳐진다. 그 끝에는 서산A지구방조제에 의해 물길이 막힌 천수만 간월호가 있다.
우뚝한 연암산의 기세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힘찬 기상이 느껴진다. 제비가 둥지를 튼 형상 같다고 하여 연암산으로 불리는 이 산은 고북면과 해미면의 경계를 이룬다. 연암산은 풍수설에서 ‘풀 가운데 사슴이 누워 있다’는 이른바 ‘초중와록형(草中臥鹿形)’의 본체에 해당하는 산이다. 초록리의 옛 이름은 ‘새푸리기’다. ‘새초[소나 말의 먹이용 풀]가 파랗고 무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18세기 중엽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초록리로 등재되어 있어 조선 시대 때부터 새푸르기, 또는 초록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300여 년 전통의 장인 마을 초록리]
초록리는 조선 후기부터 1960년대까지 옹기와 질그릇을 만들어 팔았던 점촌(店村)[수공업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17세기에 입향한 나주 김씨의 호구단자(戶口單子)를 통해서도 초록리가 점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708년(숙종 34)에 작성된 김무산(金武山)[당시 43세]의 호구단자에는 그의 직업이 ‘옹장(甕匠)’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인은 물론이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 옹장이었다. 따라서 초록리의 옹기 생산 역사는 적어도 17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록리는 울창한 연암산을 끼고 있어 옹기를 굽는 데 필수 요소인 목재를 구하기 쉽고 옹기를 빚을 태토(胎土)도 풍부하였다. 게다가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항구인 기벌포가 있어 힘든 육지 길이 아닌 바닷길을 통해 손쉽게 옹기를 운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1960년대까지 이 마을에서 동이·시루·뚝배기·독·화로·구새[굴뚝] 등이 생산되어 홍성의 갈산장이나 해미장으로 팔려 나갔다. 18세기 중엽 『여지도서』에 따르면 당시 초록리에는 55가구가 살고 있었다.
19세기 말에는 쇠솥을 만들어 파는 ‘솥점’이 많았다. 처음으로 솥점을 연 사람은 김용배(金龍培)[1870~1900]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옹기점을 하다가 솥점으로 바꾸어 일제 강점기 말까지 운영하였다.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예전에는 바다를 통해 황해도에서 주물의 원료가 되는 철을 기포리 포구로 실어 왔다. 솥점이 잘될 때는 수십 명의 직원을 고용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솥점에서 물건을 떼어 광천장·덕산장·홍성장·예산장 등을 돌며 물건을 팔고 그 대가로 쇠붙이를 받아 왔다. 물건을 받아 가기 위해 외지 상인들이 두둑한 전대를 차고 들어와서 며칠씩 주막에 묵으며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렇듯 초록리는 수세기 동안 옹기와 쇠솥을 만들어 온 명실상부한 장인 마을이었던 셈이다.
[명창 고수관의 고향은 초록리인가]
초록리는 조선 후기 8명창에 속하는 중고제 명창 고수관이 출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고수관은 초록리에서 태어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하였다. 그가 초록리 출신이라는 결정적인 자료는 없지만 마을 주민들 모두가 이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1940년에 편찬된 『조선창극사』에는 고수관이 충청남도 해미 출생으로 말년에 공주에서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가 맞다면 고수관은 초록리가 아닌 해미읍 출신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수관이 태어나고 자란 고장[읍치]을 적은 것뿐이다. 초록리는 해미읍 소재지에서 4㎞[10리] 남짓 떨어져 있는 만큼, 고수관의 주요 활동 무대는 해미읍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초록리에서 생산된 옹기와 솥 등은 해미장을 통해 주로 유통되었다. 뿐만 아니라 초록리는 조선 시대 때 홍주목에 속해 있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편 때 해미군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서 『조선창극사』를 편찬한 정노식은 고수관을 해미 사람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고수관의 선영이 초록리에 있는 것도 그가 초록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고수관의 선영은 증언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연암산 병풍바위와 꽃샘 근처 암자에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마을에는 고수관에 얽힌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수관이 초록리 사람이라는 증거는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구전으로 듣는 고수관에 대한 일화]
초록리 사람은 누구나 고수관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고 있다. 때문에 그가 초록리에서 태어나 득음(得音)을 한 명창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증언에 따르면 고수관이 살았던 집은 마을 북서쪽 ‘조롱말리’에 있었다. 이곳에는 옛날에 옹기를 굽던 가마가 많았는데, 옹기의 재료인 흙과 가마용 나무를 조랑말로 운반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 끝자락 연암산 아래에 고수관의 생가 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고수관의 집 위에는 꽃샘이라는 신비스러운 우물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판소리의 신동으로 불렸던 고수관은 창 연습을 한 뒤에 이 샘물을 마시고 목이 트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고수관은 자신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꽃샘 부근에서 득음을 위해 피나는 연습을 거듭하였다. 소리 훈련을 하다가 목이 마르면 이 샘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고, 지독한 연습과 반복 훈련 끝에 목청이 트이는 득음의 경지에 올랐다. 이러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꽃샘은 고수관의 목을 트이게 한 신비스러운 샘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고수관은 초록리에서 허술한 ‘꼬작집[혹은 꼬약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작은 집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광대들로 항상 떠들썩했다. 고수관은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를 가장 잘 불렀다. 만년에는 목소리가 변해 코 먹은 소리를 내게 되었는데, 그를 따르던 예인(藝人)들은 이것까지도 따라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수관에게는 소리뿐만 아니라 사람을 웃기는 재주도 있었다. 이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 어느 날 임금이 고수관을 불러서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그렇게도 사람을 잘 웃긴다고? 어디 그럼 황소를 한번 웃겨 봐라.” 고수관은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운을 떼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돌아온 고수관이 수건을 황소의 코에 대자 흥분한 황소가 하늘을 보고 웃더라는 것이다. 황소를 웃긴 비결은 바로 발정 난 암소의 오줌을 묻힌 수건이었다. 이에 임금이 고수관의 재주에 탄복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 여기에 초록리 주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본다.
“우리 마을에 그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고수관 선생이 그 봄날 거기서 낮잠을 자다가, 그 꽃샘이라는 샘에 가서 물을 먹구서 피를 토했답니다. 우리 마을에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유. 그렇게 하구서 목청이 터져 가지구 노래를 하는디 항간에 퍼진 이야기가 ‘고수관이가 춤 추고 노래하면은 황소도 웃는다.’ 이런 그 항간에 풍문이 인저 발전이 돼 가지고,
당시에 그 왕이 ‘고수관이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냐?’ 그래서 하루는 어전으로 불러서 [임금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확인해야 되겄다.’ 고수관이를, ‘어전 앞이 가서 춤추고 노래 부르라.’고 하니까, 고수관 선생이 생각해 볼 때는 노래는 자신 있지만 황소를 웃게 할 자신은 없거든? 그러니께 이 양반이 꾀를 내가지고 발정한 암소가 오줌 싸는데다가 손수건이, 그 오줌 싸는 디다가 손수건을 대서 저길 묻혔댜. 발정된 암소의 분비물을.
그러고서 어전에서 춤추다 보니께 무당들 춤추고 하는디, 나삼(羅衫) 밑이 이렇게 손수건을 붙잡고 이렇게 춤을 추는 거 있잖여? 무수(舞袖)라고 하지, 그거를. 그걸 붙잡고 황소 주둥이다가 암소가 금방 싼 분비물을 갖다가 슬쩍슬쩍 묻혀 가며, 춤춰 가며 돌아가니께 황소가 암소, 암내 나는 분비물 그걸 맡으니께 황소가 웃을 수밖에 더 있슈? 그러니께 [임금이] ‘과연 명창이로다.’ 그랬다는 이야기가 여기 초록리에는 전설적으로 내려와요.”
이 일화는 고수관이 노래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재치와 임기응변도 뛰어난 예인이었음을 말해 준다. 아울러 궁에 초청되어 어전에서 공연을 했다는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고수관이 당대의 명창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일화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