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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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Ceerful Mueul Pungmul Drown Peasants' Care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석대권 |
[수다사 승려 정재진으로부터 시작되다]
구미시 무을면이나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 빗내 지역에서 풍물과 관련하여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이 지역에서 풍물판을 돌아다녔다 하면 “정재진 나고 매구 나고, 엄복동이 나고 자동차 났으며, 안창남을 위하여 비행기 나왔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무을풍물하면 가장 윗자리에는 정재진이라는 인물이 항상 등장한다. 정재진하면 수다사라는 절이 나온다. 이것이 무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을풍물의 시작이다.
시간 여행을 떠나 수다사로 가면, 그 시간은 신라시대까지 올라 간다. 구미시 무을면 상송리에 있는 수다사(水多寺)는 통일신라 문성왕(839~857) 때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소(慧昭, 774~850)가 창건한 절이다. 혜소는 연악산의 봉우리인 미봉(彌峰)에 흰 연꽃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절을 짓고 연화사(淵華寺)라 이름 하였다. 1572년(선조 5)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이 중창한 뒤 수다사로 고쳐 불렀다. 그런데 이 절은 태백산맥의 지맥인 해발 600m의 연악산 99곡의 지맥이 합쳐져 있는 명산에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때 100만 평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면 이 절에 있었다는 승려 정재진은 어떤 인물일까? 구체적으로 아는 바는 없다. 다만, 지역의 옛날 어른들이 이 사람에게 매구를 배웠다고 전하고 있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풍물의 한 갈래인 절굿(절 걸립)의 쇠잡이 정재진이 이 절에 머물렀고, 그의 가락이 마을 주민들에게 전수되었을 가능성이다. 시기는 대체로 조선 후기로 추측되며, 절 소유의 토지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의 고된 노동을 위로하기 위해 농사의 마디마디에 한바탕 풍물놀이가 있었을 가능성과 절에서 걸립을 하면서 전승되었을 가능성 등을 추측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현재 무을풍물의 뿌리가 수다사에 있다는 사실은 지역민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무을풍물의 전성기를 맞이하다]
정재진의 뒤를 바로 이은 사람들에 대한 정보는 정확히 없지만, 구미시 무을면 오가리에 살았던 이군선이 정재진의 쇠가락을 이었다는 증언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군선의 호적상 본명은 이경춘이고, 경주이씨로 1868년 8월 10일생이다. 이군선은 풍물의 상쇠로서 오늘날의 무을풍물을 있게 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 뒤를 무을면 오가리의 이남문과 윤필선, 그리고 무을면 무이리의 최일영 등이 이어 왔다.
오가리 이남문은 6·25전쟁 이후 금릉군 개령면 광천리로 옮겨 현재 전국에서 이름난 빗내농악을 남겼으며, 무을(무이)농악의 발원지인 무이리의 최일영은 무이리 농악을 탄생시켰다. 그 후 김칠봉·김팔금이 무이리 농악을 이어 나갔고, 안곡리의 김신배도 최일영의 가락을 배웠다. 이리하여 1960년대에 무을에서는 김칠봉 상쇠와 지창식 종쇠가 이끄는 하면농악단과 김신배 상쇠가 이끄는 상면농악단의 2개 팀이 있을 만큼 활동이 왕성하였다.
하면농악단은 김태문 단장을 중심으로 김칠봉을 상쇠로 하여 1963년 10월 30일에 조선일보 대구지사에서 주최한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우승하였고, 1964년에는 금릉군 개령면 광청리에서 주최한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또한 1965년에는 중앙일보 창간 2주년을 기념하여 중앙일보 대구지사와 경북농악협회에서 주최한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우승하였고, 1966년 5월 17일에는 경북농악협회 기성회가 주최하는 파월장병위안 영남민속경연대회에서 특등으로 국회의장상을 받았고, 그 해 10월에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하는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3등을 수상하였다.
그 후 김칠봉 상쇠는 경북 상주농잠고등학교와 김천농림고등학교 농악강사로 활약하여 선산과 상주 일대에 많은 전수자들을 길러 냈다. 하지만 김칠봉 상쇠가 사망하고 지창식 종쇠가 인천으로 이주하여 한때 무을 지역 농악의 주연들이 사라진 일도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단장 김상문과 상쇠 김신배를 주축으로 행정기관의 후원도 얻어 농악단을 다시 창단하였으며, 이 농악단은 매년 선산군 풍년제의 농악 경연에서 항상 1위를 하였다. 농악 점수로 인해 인구가 적은 무을면에서 종합 1위까지 하게 되자, 고아면과 다투다가 2개 면 모두가 수상을 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쇠퇴한 무을풍물을 다시 일으키다]
1980년대 무을농악은 유명무실하게 명맥만 이어 오다가 1990~1994년 김신배 상쇠의 병환으로 일단 중단되었다. 1994년 김신배 상쇠가 사망하자 무을농악의 전승 단절을 안타깝게 여기고, 또한 김천·선산 일대뿐만 아니라 상주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 무을농악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 위기감 속에서 주민 모두가 무을농악 재건에 나서게 되었다.
무을농악에서 갈라져 나간 금릉 빗내농악은 전국에 이름을 알리고 있으나, 무을농악의 터를 다진 상쇠 이군선의 가락은 잊혀져가고 있었다. 이에 최병화·김상문 등은 김천·선산 지역 풍물의 맏잡이라 자부해 온 무을풍물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최일영 상쇠의 아들인 최병화의 노력으로 인천으로 간 지창식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1994년 무을단위조합 건물 준공식 때 풍물을 울리고 다시 창단하면서 김상문이 단장을 맡았다. 최무웅(최병화)은 무을농악을 계승하기 위하여 무을단위조합에서 주선하는 주부 농악 연수에 나가 매주 금요일에 2~3시간씩 교육을 시켜 5월 8일 어버이날 행사에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무을풍물이 새로운 기회로 삼은 것은 199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출전이다. 이 대회 출전을 위해 단원들은 단결하여 1년간의 연습을 거쳐 대회에 출전하여 최우수상(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그 뒤 무을풍물보존회를 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을풍물은 적어도 4대에 걸친 상쇠의 전승 계보가 뚜렷하고 형성 과정과 유래 및 편성 내용으로 보아 구미(선산), 금릉(김천) 일대에서 전승된 풍물의 종갓집이라 할 만하다.
[어떤 사람들이 무을풍물의 쇠가락을 이어왔나]
무을풍물은 처음 무을면의 안곡, 무등, 백자, 무이, 우곡 등 자연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으나, 무이리에서 상쇠가 많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이 마을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한 노인의 기억에 의하면, 해방 후에 자연스럽게 농악단이 모였을 때는 24명 정도였는데, 무이리 주민이 주가 되고, 웅곡 2명, 원동 7명이었다고 한다. 무을풍물 쇠가락은 200여 년 수다사 승려 정재진이 전했다고 하나 정재진 이후에는 전승 계보가 불분명하다가 이군선 후에는 전승 계보가 분명히 나타난다.
무엇보다 늘 상쇠에서 종쇠로 이어지는 계보를 유지하며, 상쇠가 노령화하거나 사망하면 바로 종쇠가 상쇠가 되고 종쇠가 선출됨으로서 현재까지 적어도 5~6대는 전승 계보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수다사 승려 정재진 → 상쇠 이군선, 종쇠 최일영 → 상쇠 최일영, 종쇠 김팔금 → 상쇠 김팔금, 종쇠 지창식 → 상쇠 김칠봉, 종쇠 지창식 → 상쇠 지창식, 종쇠 최병화 → 상쇠 최병화, 종쇠 이삼재로 이어졌다.
특히 이 전승 계보에는 이군선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무이리 출신이며, 더욱이 그 계승이 친인척 관계로 얽혀 있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가령 김칠봉은 최일영의 사위이며 최병화의 자형이라는 것이다. 무을풍물은 무을 뿐만 아니라 김천 등지로 가지를 쳐 나갔다. 오가리 출신으로 이군선의 가락을 이은 최일영에게 전수받은 이남문이 금릉군 감문면 광천리의 속칭 빗내로 이사를 가서 쇠가락을 김흥엽에게 전수하여 지금 전국적으로 유명한 빗내농악을 일으켰다. 따지고 보면 빗내농악도 한 집안이라 할 수 있고, 그 계보 역시 이남문 → 김흥엽 → 한기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재진 이후 무을풍물의 전승 계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정재진-이군선→최일영┍김팔금→김칠봉→지창식→최무웅→박원용(무을풍물)
정재진-이군선→최일영┕이남문→김홍엽→한기식→손영만(빗내농악)
[풍물을 치는 사람들의 차림새부터 남다르다]
전승 과정이나 연행 내용 등을 조사한 것을 토대로 하여 무을풍물을 치기에 어울리는 인원 구성은 쇠 4명, 징 4명, 북 8명, 장구 8명, 소고(상모) 12~16명, 잡색 3명(포수·각시·양반), 기수 4명(농기1, 단기1, 영기2) 등으로 되어 있다. 무을풍물의 기본 복장은 전 단원이 바지저고리에 쪽빛 쾌자, 행전을 치고 쇠 4명과 소고는 전원 전립에 상모를 쓴다.
무을풍물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복장은 다른 풍물에서 볼 수 없는 상쇠의 차림새이다. 상쇠는 채복 등에 ‘한박시’라고 하는 달덩이만한 원형의 놋쇠를 2개 단다. 다른 상쇠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장식이다. 대장을 뜻하는 것으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는 것이라 하나, 달과 해를 상징한다고 해석하여 농민들의 염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상쇠의 채 끝에 늘어뜨리는 줄색 띠도 상쇠만 달았다.
다음으로 북을 치는 사람들의 머리에 화려한 이단 고깔을 썼다는 것도 다른 지역과 달랐다. 이 고깔의 꽃송이들은 춤사위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상모도 시대에 따라 생김새가 달랐다. 처음 소나무를 가지째 꺾어 댕댕이 넝쿨로 얽어서 그것을 상모 대신 머리에 쓰기도 하고, 초립에 한지를 겹겹으로 발라서 만들기도 했다. 그나마 경제적 여건이 좋아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상모를 쓴 것이다.
농기는 ‘농자천하대본(農者天下大本)’이라고 쓰지만, 이것은 ‘천황기’ ‘당산기’라 하여 신대의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무을 지역의 각 마을에서 지낸 골매기 동제사의 골매기 신을 불러 위로하고 신의 힘으로 풍년을 들게 하였으며 인간은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했으리라. 농기 위에는 꿩의 긴 꼬리를 뽑아서 만든 꿩장목을 꽂는다.
[풍물 한마당으로 농민의 응어리를 풀어보세]
무을풍물의 놀이 순서는 조사 과정에서 제보자에 따라 명칭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중심적인 놀이 과정은 대체로 12마당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1. 질굿(인사굿): 행진하는 가락으로 쇠(매구)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진할 때 친다. 신호격으로 상쇠가 입장할 때, 또는 대문 앞에서 ‘주인 나그네 들어가요’하면서 친다. 입장한 뒤 놀이 과정 준비로 원을 그리며 정렬하여 쇠에 따라 풍물꾼이 주위에 인사한다.
2. 마당닦기(반죽궁): 전원이 원을 그리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고, 쇠는 중앙으로 들어가 마주 보고 종대로 대형을 갖추어, 다시 서로 톱니가 돌 듯 제자리에서 회전하고 앞으로 모였다가 뒤로 물러선다. 전립의 꼭지 상모를 돌리면서 서로 맞붙어 회전하고, 바깥 대열과 맞물려 원형으로 돌기도 한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가 짝을 지어 묘기를 부린다. 네 가지 가락으로 바뀌면서 각기 신나게 논다.
3. 정적궁: 상쇠와 종쇠의 가락에 따라 풍물꾼이 놀이에 들어가는데 상쇠와 종쇠가 서로 이동하면서 전원을 놀린다. 12마당 중 가장 흥겹고 신이 난다.
4. 도드래기(엎어빼기·덮어빼기): 상쇠와 종쇠가 서로 맞추어 쇠를 치면 풍물꾼은 쇠가락에 맞추어 노는 가락으로 각 배역마다 점검하듯이 모든 풍물꾼이 신나게 뛰어 논다. 주로 소고놀이가 중심이 된다. 전체의 대형은 꽃술형을 그린다
5. 품앗이: 엎어빼기가 끝나면 전 풍물꾼은 원을 그리며 돌면서 놀고 원형 중앙에서 쇠들이 서로 가락을 주고받는다.
6. 영풍굿(수박치기): 품앗이가 끝나면 쇠의 가락이 바뀌어 영풍대를 치고 소고는 가락에 따라 여러 번 앉았다 섰다 기세를 자랑한다. 이때 쇠가 그치면 북과 장구만 신나게 연주하고 쇠는 서로 짝지어 쇠를 놓고 손뼉치기도 하고 띠를 잡고 기러기 춤을 추기도 한다.
7. 허허굿(허허꺽꺽): 상쇠가 가락을 치다가 ‘허허’하며 간투사를 지르면 전 풍물꾼이 ‘허허꺽꺽’하며 가락에 빈틈없이 답하는 행동으로 논다.
8. 기러기굿(너도나도 둘이돌기): 상쇠가 흥이 나서 기러기 가락을 치면 전 풍물꾼은 옆으로 뛰며, 장구·소고는 채복을 추켜잡고 기러기 모양으로 덩실덩실 춤을 춘다.
9. 이돌기(돌다가 되돌려빼기): 둘이 짝을 지어 돌다가 가락이 바뀌면 돌던 반대 방향으로 원점을 향해 옆으로 돌고 다시 가락을 바꾸어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10. 진굿(진풀이): 상쇠와 종쇠가 각각 대장이 되어 2편으로 나누어 진을 치고, 한마당 격전이 벌어진 후, 한데 어울려 상쇠가 진을 치면 총화가 이루어져 모든 풍물꾼은 흥에 겨워 덧배기 가락의 춤을 춘다.
11. 판굿(마당굿): 상쇠의 지휘에 따라 쇠, 징, 북, 장고, 소고가 각기 원진을 그리면서 5방진을 친다. 이어서 풍물꾼이 양쪽으로 갈라선 굿판 가운데서 징놀이, 북놀이, 장고놀이, 소고놀이 순으로 논다.
12. 영산다드래기: 상쇠와 종쇠는 북수 앞에서 잦은가락으로 놀다가, 상쇠는 중앙으로 나가면서 두 번 원을 돌아서 소고 중앙에 선다. 종쇠는 중앙으로 나가서 원으로 돌다가 다시 수북 쪽 이열 중앙에 선다. 상쇠와 종쇠가 각기 이열의 중앙에서 맞서고, 전 풍물꾼이 서로 중앙으로 뛰어들고 뒤로 물러서며 논다. 상쇠는 가락을 바꾸어 다시 대형을 원형으로 만들어 각기 연행하다가 쇠에 따라 관중에게 인사하고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