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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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영어의미역 | Clothing Life |
이칭/별칭 | 복식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영진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옷과 장신구에 관련되는 생활 풍속.
[개설]
민족마다 고유한 복식이 있다. 우리 민족의 고유 복식을 한복이라고 한다. 한복은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를 거듭하였다. 조선시대 복식의 역사를 보면 길이가 짧아지거나 길어지고, 품이 넓어지거나 좁아지는 등의 세부적인 변화를 거듭하다가 1884년 갑신정변 때 법령으로 복식을 규제하면서 다양하던 포(袍)가 두루마기 하나로 통일되고, 형태 또한 크게 간소화되었다. 1895년에 단발령이 공포되고, 1904년 고급 관리들에게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도록 하여 우리 민족의 의생활에 일대 변화가 왔다.
오늘날 복식은 크게 한복과 양복으로 대별할 수 있다. 엄격히 따지면 한복은 특별한 날이나 일이 있을 때 입는 특별복으로 바뀌었고, 대부분의 일상복은 서양 복장인 양복으로 대체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간소화된 한복을 일상복으로 착용한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산업화되면서 세탁과 관리가 편한 옷감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양복 디자인 기술이 확산되면서 모든 의생활 영역에 양복이 일반화되었다. 오늘날 한복은 나이든 전통 사회 성원들이나 일부 격식과 품위를 따지는 사람들이 명절과 상장례, 혼례, 특별한 모임 등에서 입는 정도이다.
구미 지역 사람들의 의생활도 우리나라의 현대 의생활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한복을 찾아 볼 수 없다. 구미 지역 유일의 의생활 기록인 사진 자료를 보면 1970년대 초반까지는 일상생활에서도 간소화된 한복을 입은 것을 찾을 수 있다. 그 후에는 양복이 의생활의 흐름을 장악한 것으로 판단된다.
[변천]
구미 지역 사람들의 의생활 변화를 일상복과 의례복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일상복은 한복과 양복이 혼용되었으며, 의례복은 전통 복식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가족들의 기념 사진첩에서 잘 나타난다. 먼저 어린이와 어른들의 일상복을 보면, 어린이는 태어나면 배두렁치(어린아이의 배와 아랫도리에 둘러주는 치마같이 만든 옷)를 입다가 돌이 지나면 풍차바지나 저고리를 입었다. 옷감은 부유한 집에서는 비단이나 인조견을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무명이나 광목을 많이 사용하였다. 때 타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치자·오미자·쑥·수수 등을 이용하여 분홍색·파란색·노란색·빨간색 등의 물을 들였다. 1930년대 이후 화학 염료가 사용되면서부터는 시장에서 염료를 구입해서 물을 들였다.
해방 이후에는 학령기 이후의 어린이 복식은 서양 복식으로 바뀌었다. 남자 어린이는 셔츠와 바지를, 여자 어린이는 셔츠와 치마를 입었다. 오늘날도 옷감의 고급화를 제외하면 같은 추세이나 여자 어린이도 바지를 즐겨 입는 점이 달라진 모습이다. 어른들의 일상복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복의 맥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외출복은 한복을 고집한 흔적들이 1960년대의 사진 자료에서 잘 나타난다. 1969년 5월에 구미시 신평2동 성인 남자들이 남원에 관광하면서 찍은 기념사진을 보면, 양복과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수가 반반이다. 그러면서도 머리에는 중절모를 모두 걸쳤다. 당시 한복을 보면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고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은 사례가 보인다. 발에는 양발과 고무신을 신었고, 바지는 댓임으로 동여매었다.
1965년 4월에 구미시 신평2동 성인 여자들이 나들이할 때 찍은 기념사진을 보면 당시 여성들은 외출복으로 한복을 고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여성들이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대부분 채색은 하지 않았으나 검정 염색을 한 치마와 점박이 무늬가 있는 저고리를 입었다. 머리는 비녀로 쪽을 지었고, 치마는 활동이 편하도록 끈으로 동여맸다. 주민들에 의하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어른들은 한복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차츰 서양화되어 남자는 양복을, 여자는 원피스나 투피스로 일컬어지는 양장을 입고 나들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복은 보통 광목이나 무명으로 만들어 입었으며, 봄과 가을에는 겹으로, 여름에는 홑으로 만들어 입었지만 겨울에는 솜을 누벼 입었다. 신발은 짚신이 거의 사라지고 고무신을 많이 신었으며, 여유 있는 사람은 구두도 신었다. 일제의 영향으로 여성들은 일상 노동복으로 몸뻬를 많이 입었다. 몸뻬는 1940년대에 여성들의 생활복 겸 노동복으로 강제로 착용해야 했다. 처음에는 단속곳이나 치마를 이용해서 몸뻬와 비슷하게 만들어 입었다. 몸뻬는 익숙해진데다가 편리하다는 이유로 해방 후에도 계속 입게 되었고 지금도 착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상복에 비해 의례복은 급변하지 않았다. 어린이 의례복인 돌복은 아직도 기념으로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아이는 풍차바지에 색동저고리·조끼·전복·복건·돌띠·타래버선을 입히고, 여자아이는 풍차바지 위에 치마를 입히고 색동저고리·치마·조바위를 입힌다. 어른 의례복은 관례복, 혼례복, 상례복, 제례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미 지역에서 관례는 해방 전후까지 행해지는 사례가 있었는데, 남자는 약식으로 바지와 저고리, 갓을 착용하고, 윗옷으로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었다고 한다. 여자는 시집가기 전날 ‘머리 올린다’고 하여 한복을 입고 쪽머리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고 한다.
전통 혼례복은 1970년대까지도 입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가정의례준칙에 따라 예식장에서 소위 신식 혼례를 올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더러는 구식 혼례를 올렸기 때문이다. 혼례 때 여성은 마을 공동 재산으로 장만해 놓은 원삼 또는 활옷을 입었다.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에 사모관대로 표현되는 단령·사모·각대·목화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모관대도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을 빌려 입었다.
의례복 중에서 가장 변화가 적은 것이 상례복이다. 상례복은 유복친이라고 하여 망자의 8촌 이내 친족이 모두 입는데, 망자의 아들은 삼베로 만든 굴건제복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딸과 며느리는 삼베나 광목 등의 흰색 천으로 된 상복과 짚에 삼을 섞어서 동아줄처럼 만들어 허리에 띠는 요질(腰絰), 머리에 두르는 수질(首絰)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60년대 말 당시 선산군 구미면 장동에 사는 김봉식의 조모 상 때 찍은 사진을 보면 남자 상주는 굴건제복을 착용하고, 여자 상주는 삼베 치마저고리에 요질과 수질을 갖춘 모습이어서 이때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상례복이 착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종만(79세)에 따르면 가정의례준칙이 정해진 1960년 이후 간소화되어 일반 삼베나 광목으로 바지와 저고리, 두루마기, 두건, 치마 등을 만들어 입는 경우가 늘어났다고 한다. 제례 때에는 바지저고리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유건이나 갓을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현황]
현재 구미시의 의생활은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는 의생활의 변화 양상과 큰 차이가 없다. 일상복은 양복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집안에서는 남녀 모두 트레이닝복이나 티셔츠, 남방에 바지를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례복도 서양식 복장을 많이 따르고 있다. 여자들의 혼례복은 서양식 웨딩드레스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남자들은 턱시도 차림이나 양복을 주로 입는다. 다만 폐백을 올릴 때는 전통 혼례복을 입는다.
상례복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남자는 검은색 양복 슈트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굴건과 상장을 하는 경우와 삼베나 광목 등의 흰색 천으로 만든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에는 삼베 두건을 쓰는 경우가 있다. 여자는 검은 색 한복을 입거나 검은 색 양장을 상복으로 입는 경우와 삼베나 광목 등의 흰색 천으로 만든 저고리와 치마를 입는 경우가 있다. 제례복은 가문에 따라 전통을 고집하여 도포와 유건, 혹은 두루마기와 유건을 착복하는 집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 가정에서는 대부분 양복이나 일반 외출복을 입는 경우가 많다. 전통 제례복의 단절은 기제 때에 더욱 심하며, 설이나 추석 등의 명절 때는 비록 유채색이긴 하지만 한복을 입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