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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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集姓村 |
영어의미역 | Single Clan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경상북도 구미 지역에서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모여 사는 촌락.
[개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강조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고려왕조의 불교적 색채는 조선 전기까지 끈질기게 남아 있었으며, 조선왕조가 추진하는 성리학적 지배이데올로기는 중종 연간을 지나면서 서서히 지방 양반과 일반 백성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인, 재산의 자녀 균분 상속, 제사의 자녀 윤회봉사(輪廻奉祀)를 특징으로 하는 조선 전기의 가족 및 상속 제도는 서로 인과 관계를 가지면서 성관(姓貫) 의식과 족보 편찬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남귀여가혼은 결과적으로 딸(사위)과 그 소생(외손)을 아들 또는 친손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부처·부모·자녀·내외손을 각기 대등한 위치로 간주하여 쌍계적 친족관계를 낳게 했으며, 그러한 혼속과 가족제도는 재산의 자녀 균분제를 낳게 하였다. 자녀 균분제는 부모의 제사를 자녀들이 윤봉하는 관행을 낳았고, 이러한 관행은 자녀와 내외손들을 한 마을에 공거하게 하는 이성잡거(異姓雜居)의 거주상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전기의 관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점차 바뀌었다. 즉 남귀여가의 혼인은 여성의 출가로, 재산의 자녀 균분 상속은 자녀 차등 상속으로, 제사의 자녀 윤회는 중자윤회(衆子輪廻) 내지 장자전행(長子專行)으로 바뀌면서 점차 부계 친족이 중심이 되는 동성의 집성촌 마을이 생겨나고 그러한 관행은 조선 말기까지 성행하였다. 일제시기에 실시된 관습 조사에 따르면 집성촌은 일제강점기까지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시대의 신분 질서가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되었고, 또한 1960년대 경제개발 추진 과정에서 농촌 인구의 도시로의 유출이 꾸준히 진행되면서 집성촌은 점차 와해되어 갔다.
구미 지역의 경우 1970년대 이래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전국의 젊은이들이 유입되면서 원주민은 줄어들고 있다. 또한 늘어난 인구를 수용할 주택과 상가를 비롯하여 문화 시설, 편의 시설 등이 들어서게 되자, 택지개발지구에 들어가게 된 집성촌은 그 규모가 크게 줄거나 형태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멸실되었다. 구미 지역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던 성씨는 선산김씨, 일선김씨, 안강노씨, 벽진이씨, 인동장씨, 해평길씨, 해평윤씨, 전주최씨, 밀양박씨, 진양하씨, 김해허씨, 청송심씨, 전주유씨, 그리고 기타 성씨 등이다. 20여 년 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해평면 일선리에 집단으로 이주한 전주유씨의 집성촌은 특별한 사례에 속한다. 집성촌을 이루었던 성씨별로 성관의 유래와 입향 등 집성촌의 형성 과정과 거주 현황을 살펴본다.
[선산김씨]
선산김씨(善山金氏) 집성촌은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들성) 일대로, 김취문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전성기에는 130여 호가 거주하였으나 근래에는 40~50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최근 아파트 건립을 하게 되면서 집성촌은 거의 철거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경상북도 기념물 제132호 김종무 충신정려비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3호 대월재 등 지정문화재와 재사 등 건축물 4점이 인근에 있는 문중 소유의 야산으로 이건될 예정이다.
[일선김씨]
일선김씨(一善金氏) 집성촌은 구미시 선산읍 신곡리 재궁마을 일원으로, 고려 말 조선 초 인물인 김주가 출생한 마을이다. 김주의 후손으로 좌의정을 역임한 김응기(金應箕)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전성기에는 100여 호가 거주하였으나 최근 50~60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집성촌이 있는 재궁마을은 조령 이남에서 풍수지리적으로 최고의 길지라는 뜻으로 조일(鳥一)이라 불렀으며, 와전되어 새일·사일로도 불린다.
[안강노씨]
안강노씨(安康盧氏) 족보에 의하면,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는 본래 중국 탁주(涿州) 범양현(范陽縣) 사람으로 벼슬은 한림학사와 대호군에 이르렀다. 그의 집안에서 누대에 걸쳐 현달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자 당 덕종(德宗)이 이를 미워하였다. 정치가 어지럽고 환란이 일어날 조짐이 있자, 노수는 당 선종 때 아들 9형제와 함께 패수(浿水)를 건너 평안도 정주 능리촌에 옮겼다가 다시 용강 쌍제촌으로 이주하였다. 신라 조정에서는 노수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여 계림에서 생을 마치게 했다고 한다.
안강노씨 문중은 노수의 묘소를 찾을 수 없어 1929년 전라남도 광주 능안동에 시조와 아홉 아들의 단을 설치하여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아홉 아들은 광주백(光州伯) 노해(盧垓), 교하백(交河伯) 노오(盧塢), 풍천백(豊川伯) 노지(盧址), 장연백(長淵伯) 노구(盧坵), 안동백(安東伯) 노만, 안강백(安康伯) 노곤(盧坤), 연일백(延日伯) 노증(盧增), 평양백(平壤伯) 노판(盧坂), 곡산백(谷山伯) 노원(盧垣)이다. 아홉 아들 모두가 9읍을 분봉 받았는데 자손들이 봉읍을 각각 본관으로 하였다.
안강노씨는 안강백에 봉해진 노곤을 시조로 한다. 그러나 자료의 멸실로 대서(代序)가 명백하지 않아 노광한(盧光漢)을 중조(中祖)로 하고 있다. 노광한은 신라의 변방 지대에 거주하였으며 대광정승을 지냈다. 그 일파가 선산에 살았으며, 상주·의성·개령·용궁·예천·군위 등지에도 살았다. 이후 세대가 확실하지 않은 8대의 인물이 족보의 별록에 실려 있으니, 노인도(盧仁度)·노호(盧浩)·노진해(盧晋諧) 3세, 노직선(盧直繕)·노맹신(盧孟信) 부자, 노견(盧絹)·노천익(盧天益)이다. 4세 노희식(盧希軾), 5세 노수함(盧守諴)으로 계보가 이어진다. 6세는 8남 1녀로, 8남은 노경준(盧景俊)·노경인(盧景仁)·노경필(盧景佖)·노경건(盧景健)·노경륜(盧景倫)·노경임(盧景任)·노경전(盧景全)·노경동(盧景仝)이다. 이 대에서 현달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노종선(盧從善)과 노희선(盧禧善) 형제 대에서 두 계통으로 갈라져서 각각 1세조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2세는 노소종(盧紹宗)이다. 독동(禿同)의 입향조는 3세인 노관(盧綰)이다. 노종선의 6세손 노경필이 구미시 봉곡동에 입향하였고, 그 동생인 노경륜은 선산과 상주에, 노경임은 선산의 송암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또한 5세손 노보세(盧輔世)는 의성에 터를 잡았으며, 노희선(盧禧善)의 자손들은 군위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경 조사된 내용에 의하면, 안강노씨는 선산군 선산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노경필·노경륜·노경임의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안강노씨의 대표적 인물인 노경임은 장현광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리·지평 등을 지내고 순무어사로 강원도에 나아가 삼척부사 홍인걸(洪仁傑)의 비행을 적발하였다. 그 후 지평을 거쳐 예조정랑이 되고 체찰사 이원익의 휘하에서 크게 신임을 얻었다. 이에 앞서 스승 장현광의 심부름으로 정인홍의 인품을 관찰하고 돌아와 대단히 간사한 인물이라고 말했던 것이 정인홍에게 알려져 성주목사로 있을 때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때부터 낙동강변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안강노씨는 경북 220명, 대구 122명, 서울 138명 등 전국에 740여 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독동마을에는 역락재공파(亦樂齋公派) 파조인 노경륜의 후손이 영남유교문화진흥원(원장 노진환)을 만들어 영남사림파 형성의 본거지가 되었던 구미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독동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록에는 선조 묘소가 있으며, 마을 왼쪽에 문산서원이 있다.
이미 전통 한옥 건물로 하계정사와 열락당, 문중의 묘하재실 등을 건립하였으며, 현재는 영남 유학자의 문집과 각종 고문서 2만여 점을 전시, 교육, 연구하는데 필요한 한옥을 짓고 있다. 건물이 완성되면 전통 문화에 대한 다양한 교육은 물론 성리학을 체험할 수 있는 명소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전성기에 70여 호가 거주하였으나 현재 30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벽진이씨]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집성촌은 구미시 광평동 다송과 형곡동 시무실 일원으로, 이민선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광평동은 박정희체육관 건립으로, 형곡동은 구획 정리 사업으로 집성촌의 모습이 크게 훼손되었으며, 현재 10여 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구미시 봉곡동 별남에는 이약동의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과거 40여 호가 거주하였으나 구획 정리 사업으로 지금은 5~6호 정도 거주하고 있으며 향후 몇 년 내에 멸실될 것으로 보인다.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에는 생육신 이맹전의 묘소가 있으며, 구미시립중앙도서관 내에 유허비가 있다.
[인동장씨]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세거지는 여러 곳에 있다. 구미시 인의동 남산마을 일대는 장현광이 출생하고 거주한 지역으로 장현광의 후손인 남산파가 세거했다. 전성기에 100여 호 정도 거주하였으나, 진평·인동의 구획 정리 사업으로 지금은 2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구미시 오태동과 칠곡군 석적면 중리에도 장현광의 후손 일부가 살고 있다. 오태동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이 태어난 곳이며,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관찰사와 판서를 지냈다. 구미시 황상동에는 장잠(張潛)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해평길씨]
해평길씨(海平吉氏)의 집성촌은 구미시 도량동 밤실[栗洞]에 있으며, 전성기에 50여 호 정도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10여 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길재는 그의 부친이 금산군수에 재직 중일 때 그곳에서 장가를 들었으므로 외가인 금산과 관련이 깊다. 길재의 후손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면 불이리로 많이 이주하였고, 선산에서는 족세가 미약한 편이다. 후대에 정치인 길재호 등 유명한 인물이 금산에서 출생하였다. 길재의 유적으로는 구미시 남통동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 채미정, 구미시 오태동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지주중류비, 그 외에 길재 유허비와 길재 묘 등이 있다.
[해평윤씨]
해평윤씨(海平尹氏)는 고려시대에 해평에 거주하였으나 일찍이 상경종사하여 시조 산소가 남아 있을 뿐 집성촌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현재 5~6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상경한 계열에서 윤보선 대통령이 배출되어 선대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선산을 찾았다고 한다.
[전주최씨]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집성촌은 최수지의 입향으로 형성된 해평면 해평리 일대로 최현(崔晛)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최응룡·최산휘·최산립 등의 인물이 배출되었다. 전성기에 90여 호 정도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40여 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구미의 개발 중심지로부터 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집성촌의 모습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는 점이다. 지정문화재로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05호 해평 쌍암 고택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1호 해평동 북애 고택이 있다. 만석의 재력을 가졌을 때 6형제에게 각각 집 한 채씩을 지어 분가시켰으나 4채는 없어지고 현재 2채가 남아 있는 것이다.
[밀양박씨]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집성촌은 파별로 형성되었다. 경주공파의 집성촌은 경주부윤을 지낸 박수홍(朴守弘)의 후손들이 세거해 온 구미시 봉곡동 일원으로, 전성기에는 80여 호 정도 거주하였으나 봉곡동 구획 정리 사업으로 지금은 거의 이주하고 집성촌의 모습은 멸실되었다. 다만 유적으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1호 봉곡동 효열비각 외에 묘소, 신도비, 재사인 백인당이 있다.
밀양박씨 용암공파의 집성촌은 용암(龍巖) 박운(朴雲)의 후손이 세거해 온 해평면 괴곡리 일대로, 전성기에는 60~70호 정도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20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현재 16대손인 박인희(朴仁熙)가 종손으로서 문중을 대표하고 있다. 밀양박씨 송당공파의 집성촌은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후손들이 세거해 온 구미시 선산읍 신기리 송당마을에 있다. 박영이 벼슬살이 후 말년에 온 곳이지만, 후손들이 전국 여러 곳에 거주하게 되어 집성촌으로서의 면모는 없다. 유적으로는 박영의 묘소, 신도비, 불천위 사당이 있다. 현재 18대손인 박기후(朴基厚)가 종손으로서 문중을 대표하고 있다.
[진양하씨]
진양하씨의 세거지는 선산읍 완전리 일원이지만, 하위지가 사육신으로 처벌되면서 직계 후손이 멸절되자 살아남은 일족은 안동시 서후면으로 이주하여 세거하게 되어 이곳은 후손들이 별로 없다. 다만 유적으로 선산읍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된 단계하위지선생유허비 외에 의관묘(衣冠墓)가 있다.
[김해허씨]
김해허씨의 세거지는 구미시 임은동 일원으로 허돈의 후손이 살고 있다. 허전의 제자로 한말의 대유학자 허훈, 의병장 허위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전성기에 70호 정도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10호 정도 거주하고 있다.
[청송심씨]
청송심씨의 세거지는 구미시 선산읍 이문동과 구미시 봉곡동 일원으로,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의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전성기에는 두 마을에 각각 70여 호가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문동에 10호 정도, 봉곡동에 20호 정도가 남아 있다.
[전주유씨]
안동에 정착한 전주유씨(全州柳氏)는 고려 초 대승(大丞)을 역임한 유차달(柳車達)의 후손으로, 고려 말 완산백(完山伯) 유습(柳濕)을 시조로 한다. 증손 유의손(柳義孫)이 집현전 학사로서 단종 폐위 때 전주 황방산(黃方山)에 은거하였고, 그의 손자인 유식(柳軾)이 강릉판관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유윤선(柳潤善)이 영주로 남하하였다. 그 손자인 유복기(柳復起)가 의성김씨 김진(金璡)의 외손이 되어 안동 수곡(水谷; 무실)에 정주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450년간 세거하였다.
전주유씨는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1986~1988년경 일부는 수몰을 면한 수곡 지역에 집단으로 이주하여 거주하게 되고, 일부는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외에는 서울, 부산, 안동 주변 등에 분산 거주하게 되었다.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새롭게 형성된 전주유씨 집성촌은 약 80여 호로, 타성 5가구(안동권씨 2, 김해김씨 1, 예안이씨 1, 고성이씨 1) 외에는 모두 전주유씨이다. 마을 면적은 약 89,100㎡이며, 주민들에게 불하된 토지는 약 831,600㎡이다. 전국적으로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지역 주민들이 집단으로 옮겨 형성된 마을은 많으나, 이 마을처럼 동성촌락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주민들이 전통적 의례와 화목을 중시하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일선리로 옮겨오기 전 전주유씨의 거주지는, 용암공파(龍巖公派)·임고위파(林皐位派)는 안동 수곡1동에, 목사위파(牧使位派)·삼가정파(三檟亭派)는 수곡2동에, 삼가정파(三檟亭派)·수남위파(水南位派)는 박곡동에, 만령공파(萬嶺公派; 三山公派)는 마령동에, 임고위파(林皐位派)는 길안면 용계리에 있었다.
전주유씨가 이주하면서 일선리로 옮겨온 지정문화재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호 용와 종택 및 침간정,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59호 망천동 임당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호 삼가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1호 수남위 종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3호 임하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 대야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호 근암 고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7호 호고와 종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호 만령 초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호 동암정 등이다. 지정되지 않은 전통 건물로는 수서 고택, 청암정, 동호재, 위남정 등이 있다.
마을의 형국도 배산임수한 자리에 좌청룡 우백호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한 마을에 지정문화재를 포함하여 전통 건물이 많이 있어 외양이 더욱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행정동명도 당초 해평면 낙산리(洛山里)였던 것을 낙산이라는 지명이 유씨 성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보아 일선리(一善里)로 바꾸었다. 이는 이주 과정에서 여러 번의 사전 답사를 통해 고향인 안동 수곡의 낙동강 물이 흘러오는 하류 지역으로, 농지와 마을을 구성하는 지리적 여건을 세심하게 고려했던 전주유씨 문중의 판단에서 비롯한 것이다. 현재 유복기의 16대손인 유종하(柳鍾河)와 수남위파의 유해종(柳海鍾) 등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기타 성씨]
위에 언급한 성씨 외에도 구미 지역에 거주하는 성씨들이 있다. 해주정씨는 선산읍 망정에 거주하고 있고, 의성김씨는 도개면 신곡에 거주하고 있고, 동애(東厓) 김돈(金墩) 계열은 증손 김도화(金道和)를 배출하였고 후손으로 현 선산향교 전교 김준원(金駿源)이 있다. 상산김씨가 무을면 송삼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후손으로 김보륜(金輔輪)의 18세손 김연철(金演哲, 전 교육감)이 있다. 이외 신천강씨 강유선(康惟善) 계열, 덕산황씨 황기로 계열, 덕수이씨 이우 계열 등이 있으나 집성촌 형태로 거주하고 있지는 않다.
[의의와 평가]
구미 지역의 집성촌은 경상북도의 여타 시·군의 집성촌과 비교해 그 변화가 매우 큰 편이다. 공단 조성이나 택지 개발 등으로 집성촌 규모가 크게 줄어들거나 집성촌 구성원의 집단 이주로 인해 기록만 있고 현장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또한 개발 구역의 외곽에 있어 직접적인 훼손이 없는 집성촌이라 하더라도 인구 유출로 인해 거주 가구가 상당한 정도로 감소하고 고령화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전통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있고, 외지로 이주하더라도 집성촌 구성원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며 자녀의 배우자를 결정할 때 문중을 고려하고 명절에는 고향과 조상 묘소를 찾는 관습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시대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을 때 국가적인 사업으로 집성촌의 실태를 조사하고 학술 연구의 근거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경북 지역의 안동 등 집성촌의 외형과 구성원이 어느 정도 온존하고 있는 곳을 대상으로, 전통의 생활 모습과 제례 등 민속을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는 한옥 체험 등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