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61
한자 李民寏
이칭/별칭 이장(而壯),자암(紫巖),충간공(忠簡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3년연표보기 - 이민환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46년연표보기 - 이민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60년 - 이민환 이조 판서에 추증
추모 시기/일시 1871년 - 이민환 충간공 시호 책봉
묘소|단소 이민환 묘소 -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영천(永川)
대표 관직 경주 부윤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시호는 충간공(忠簡公). 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이광준(李光俊), 어머니는 인의(引義) 신권(申權)의 딸 평산 신씨(平山 申氏), 할아버지는 참봉(參奉) 이여해(李汝諧), 증조할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세헌(李世憲), 처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와 군수(郡守) 홍귀상(洪龜祥)의 딸 남양 홍씨(南陽 洪氏)로 알려져 있다. 형이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한 이민성(李民宬)으로 함께 현달하였다.

[활동 사항]

이민환(李民寏)[1573~1649]은 1573년(선조 6) 출생하였다. 8세에 독서를 시작하였는데, 10세에 아버지 이광준이 『춘추(春秋)』 읽기를 시험하니, 크게 통하였다고 한다. 형 이민성과 더불어 젊은 시절 김성일(金誠一)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장성한 이후로는 장현광의 문하에 있으면서 퇴계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민환은 형 이민성과 더불어 부친의 강릉 부사(江陵 府使) 임지에 있었다. 일본군이 강릉 지역을 침범하자 형과 더불어 군대를 결성하여 이들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전란 도중 이민환은 부친의 임지를 시종하며 여러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1600년(선조 33)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승정원(承政院)과 예문관(藝文館)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601년(선조 34) 예문관의 대교(待敎)와 봉교(奉敎)에 제수되었다.

1602년(선조 35) 아버지 이광준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로 부임하자, 형 이민성과 함께 휴가를 얻은 뒤 임지로 가서 배행하였다. 이듬해 아버지 이광준, 형 이민성, 간성 군수(杆城 郡守) 최립, 흡곡 현령(歙谷 縣令) 한호(韓濩) 등과 더불어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그때의 기록이 『유금강산권(遊金剛山卷)』으로 남아 있다.

1603년(선조 36) 명나라에서 파견된 장수를 선조가 접대하였는데, 이때 이민환은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입시하였다. 선조가 명나라 장수의 고향을 물으니, 금화부(金華府)라 하였다. 선조가 금화부는 백운거사(白雲居士)가 사는 곳으로 그 상세한 거주지를 주위에 물으니, 사관 중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으나 이민환이 답을 말해 줌으로써 모두 그 박식함에 감복했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 司書),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병조 좌랑(兵曹 佐郞)에 제수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평안도 암행어사(平安道 暗行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때 왕자궁(王子宮)의 노(奴)들이 권세를 믿고, 평안도 일대에서 온갖 작폐를 저지르고 있었는데, 이민환이 이들을 잡아 장폐(杖斃)시키니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1608년(선조 41)에는 영천 군수(永川 郡守)로 부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충원 현감(忠原 縣監)[충청도 충주목이 강등되었을 때 두어졌던 관직]으로 부임하였는데, 수령으로의 행실과 다스림에 문제가 있다고 사간원의 공격을 받아 파직되었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강경 북인(北人)들은 사간원을 이용해 이민환을 배척한 것이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에서 후금(後金) 공략을 위해 원병을 요청해 왔다. 이에 1619년(광해군 11) 2월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원병을 파견했는데, 이민환이 종사관(從事官)으로 따라 갔다. 3월 마가채(馬家寨)에 도착하였으나, 군량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3월 4일 명나라 군사들을 따라 부차(富車)에 도착했으나, 명나라 군사들은 모두 패퇴하고 말았으며, 조선군도 곧 후금 군사들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강홍립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광해군의 뜻에 따라 후금에 투항하였으나, 이민환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투항이 결정되자 이민환은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후금의 포로가 되어 건주(建州)에서 17개월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에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박엽(朴燁)이 의주로 돌아온 이민환을 4년 동안 붙잡아 두었다. 박엽은 원병 파견 당시 군량미 보급에 대해 이민환의 질책을 받아 사감이 있었으며, 마침 북인 세력들의 강경한 입장에 따라 광해군이 물러 갈 때까지 관서(關西) 지방에 억류되었던 것이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민환은 한성으로 돌아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33년(인조 11) 대동도 찰방(大同道 察訪), 1635년(인조 13)에는 홍원 현감(洪原 縣監)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 14) 군비 강화를 위한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고, 이번에도 이민환은 영남호소사 장현광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38년(인조 16)에는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군자감 정(軍資監 正)을 거쳐 동래 부사(東萊 府使)가 되었다. 동래 부사 재임 시절 사대부 자제를 모아 『소학(小學)』을 강론하기도 했다. 이 중 특출한 이는 추천하는 등 교육과 교화에 힘썼다.

1641년(인조 19) 장예원 판결사(掌隷院 判決事)에 임명되었다. 당시 공신 세력들이 수외(數外)의 노비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장예원의 누적된 장부를 정리하여 공신들이 부당하게 늘린 노비를 본역(本役)으로 돌리기를 인조에게 청하였다. 하지만 공신세력 등의 반발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1643년(인조 21)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조 참의(戶曹 參議)에 제수되었다. 1644년(인조 22) 호조 참판(戶曹 參判)에 제수되어 다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1645년(인조 23)에는 경주 부윤(慶州 府尹)으로 부임하였다. 노쇠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향촌의 교화를 위해 매월 알성례(謁聖禮)에 몸소 참여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복했다고 한다. 1646년(인조 24)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이민환의 문집으로 8권 3책의 『자암집(紫巖集)』이 전한다. 『자암집』은 이민환의 후손 이수태(李秀泰)와 이덕룡(李德龍)의 주도로 1741년(영조 17)에 간행되었다. 『자암집』에서 주목할 것은 후금의 포로로 있을 때 작성한 글들이다. 권5 잡저(雜著)에 수록된 「책중일록(柵中日錄)」은 1619년 강홍립의 종사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심하(深河)에서 패전한 후, 목책 속에 17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적의 실정과 견문을 지은 것이다. 한편, 권6의 「건주문견록(建州聞見錄)」은 당시 후금의 상황을 기록하고 끝에 방비책을 기록한 것이다. 그 외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후금 관련 기록들은 17세기 초반,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후금과의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60년(철종 11) 영남 유생들이 증직과 시호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 吏曹 判書 兼 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추증되었다. 이어 1871년(고종 8)에는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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