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60
한자 李民宬
이칭/별칭 관보(寬甫),경정(敬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0년연표보기 - 이민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이민성 정시 문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26년 - 이민성 우승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이민성 경상좌도 의병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628년 - 이민성 좌승지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29년연표보기 - 이민성 사망
출생지 이민성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이민성 거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지도보기
묘소|단소 이민성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신평리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장대서원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신평리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영천(永川)
대표 관직 승정원 좌승지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 진사(進士) 이세헌(李世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參奉) 이여해(李汝諧)이며, 부친은 관찰사(觀察使) 이광준(李光俊)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로 인의(引義) 신권(申權)의 딸이며, 부인은 양양 권씨(襄陽 權氏)로 권문연(權文淵)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민성(李民宬)[1570~1629]은 7세에 수학(受學)하기 시작하여, 15세에 고시(古試)를 특히 즐겼다고 한다. 19세 때 김성일(金誠一)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1597년(선조 30) 4월 정시(庭試)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承文院 權知 副正字), 기사관(記事官)이 되었다. 1600년 정자(正字), 저작(著作), 직장(直長), 박사(博士) 등을 거쳐 1602년 주서, 설서(設書), 사서(司書), 감찰(監察)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이해 왕세자 책봉 때 주청사(奏請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

1603년(선조 36) 명나라에서 다녀온 후 전적(典籍), 예조 좌랑(禮曹 佐郞)이 되었다. 『국조 보감(國朝 寶鑑)』을 교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곧 병조 좌랑(兵曹 佐郞)이 되었다. 이해 친지들과 더불어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유람하고 『유금강산권(遊金剛山卷)』을 남겼다. 1604년 병조 정랑, 이어 부사직(副司直)을 거쳐 제주 점마어사(濟州 點馬御使)가 되었다.

1606년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1608년 선조 승하 직후 지평(持平)과 부사직에 임명되었다. 6월에는 선조의 만장(輓章)을 지어 올렸다. 8월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홍문관(弘文館)에 선입(選入)되었으나, 부친의 상사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와 3년상을 치렀다. 1613년(광해군 5) 예조 정랑(禮曹 正郞)에 제수되었는데, 이덕형(李德馨)을 구원하다 체파(遞罷)되었다. 이어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1614년(광해군 6) 홍문관 부수찬(弘文館 副修撰), 부수찬 겸 지평, 교리 겸 경연 시독관(校理 兼 經筵試讀官)이 되었으나, 추숭하전(追崇賀箋)을 올리는 과정에서 북인의 공격을 받아 파직되고 말았다. 1615년(광해군 7) 충무위 사과(忠武衛 司果)가 된 후, 이원익(李元翼)의 신원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곧 북인의 공격을 받아 삭직되고 금고에 처해졌다. 1617년(광해군 9) 폐모론이 또 다시 발의되자, 반대하는 차자를 올렸는데 이번에도 이이첨 등의 공격을 받아 삭직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물러 갈 때까지 고향에 머물며, 장현광에게 종유하는 등 동생과 더불어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주문사(奏聞使)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이듬해까지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5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자, 영남 호소사(嶺南 號召使) 장현광의 추천으로 경상좌도 의병장(慶尙左道 義兵將)으로 활동하며, 전주(全州)까지 왕세자를 보호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좌승지, 우승지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 저술]

1664년(현종 5) 양자 이정기(李廷機)가 『경정집(敬亭集)』을 간행하였고, 남긴 시가 대략 1,000수 정도 되는데, 『경정집』 권6에서 권8까지 걸쳐 있는 「연사창수집(燕槎唱酬集)」은 1623~1624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동안 지은 시이다. 특히 이 시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이적선(李謫仙)[이태백(李太白)의 이름]이라 불렸다고 한다. 속집에 수록되어 있는 「조천록(朝天錄)」도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오며 쓴 기록으로, 당시 조선, 명나라, 청나라 삼국의 외교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 외 동해 조수와 관련된 「동해 무조석론(東海 無潮汐論)」, 백제의 장수 계백(階伯)을 높이 평가한 「계백론(階伯論)」과 같은 논설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신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에 위치한 장대 서원(藏待 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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