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16
한자 金晅
이칭/별칭 용회(用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위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234년연표보기 - 김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260년 - 김훤 과거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269년 - 김훤 성절사 서장관으로 원에 감
활동 시기/일시 1270년 - 김훤 금주 방어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93년 - 김훤 좌간의대부로 원에 하정사로 감
활동 시기/일시 1295년 - 김훤 밀직 학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305년연표보기 - 김훤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의성
대표 관직 찬성사

[정의]

고려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용회(用晦)이다.

[활동 사항]

김훤(金晅)[1234~1305]은 1260년(원종 1) 과거에 합격했다. 1269년(원종 10) 임연(林衍)원종을 폐하고 원종의 아우인 안경공(安慶公) 창(昌)을 세웠을 때 뒷날 충렬왕이 되는 세자는 원에 있었다. 원 황제가 세자를 동안공(東安公)으로 책봉하고 군대를 고려로 보내 임연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 당시 김훤은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는데, 원 황제에게 글을 올려 임연의 토벌 계획을 중지케 하였다. 그후 임연은 원의 압력에 굴복하여 폐위 5개월만에 원종을 복위시켰다.

1270년 금주 방어사(金州 防禦使)로 파견되었는데 이듬 해 정월 밀양에서 박경순(朴慶純), 박방보(朴方甫), 박계년(朴桂年) 등이 군민을 불러 모아 공국병마사(功國兵馬使)로 칭하고 밀성과 금주의 수령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진도의 삼별초와 호응하려고 하자 이를 진압하였다. 또한 삼별초의 잔적들이 금주를 쳤는데 그가 계책을 써서 막아내었다. 따라서 그 공로를 치하하여 금주를 금녕 도호부(金寧 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예부 낭중(禮部 郎中)을 제수하고 도호부사(都護府使)로 삼아 진수케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총랑(摠郞)을 거쳐 전라도 부부사(全羅道 部夫使)로 부임하는 도중 청호역(菁好驛)에서 전라도 안찰사 노경륜(盧景綸)이 역을 통해 서울로 내선(內膳)을 운반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중 사선(私膳)이 절반이나 되었기 때문에 몰수하여 국고로 돌렸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무고를 당해 파면되고, 양주 부사(襄州 副使)로 강직되었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이르렀는데 1293년 11월에는 좌간의대부로써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갔다. 1295년 9월 밀직학사(密直學士)에 배수되었으며,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충선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춘궁시독(春宮侍讀)으로 시종하였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있을 때 참소를 입어, 왕에게 청하여 귀국한 후 병을 칭탁하여 관에 나가지 않고 치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가 1305년(충렬왕 31)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예서(隸書)를 잘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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