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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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건마산(乾馬山) 일대에서 벌어진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 건마산은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에 위치한 산으로, 걸마산·부마산·성재 등으로도 불린다. 높이는 395m이며 단촌면 병방리와 점곡면 송내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2002년 출판된 『의성 지명 유래』에 따르면, 건마산에는 병방산성이 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발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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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 지역에 분포해 있는 삼국 시대까지 조성된 무덤. 경상북도의 중앙 내륙에 위치하고 있는 의성군은 한때 조문국(召文國)이라는 국명을 가지고 흥망성쇠를 겪었고, 멸망한 뒤에는 신라의 지배 하에서 중요한 거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의성 지역의 지형은 동남쪽의 팔공산을 중심으로 북으로 팔공산-가산-청화산-만경산, 서북으로 팔공산-화산-연점산-황학산-기룡산-갈라산으로 이어지는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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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상두(權相斗)[1870~1936]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출신으로, 안동 권씨 부정공파 와룡 감애[안동]가의 제일 큰집 출신이다. 3·1 운동 때 유림측에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을 할 때,134명 유림 대표와 함께 서명하였다. 권상두가 살고 있던 단밀면은 원래 상주에 속해 있다가 1895년 비안군으로 편입되었다. 단밀면은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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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열녀. 본관은 성주(星州). 아버지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 이웃하는 사곡면 음지리의 이재필(李載馝)이고, 김종행과 혼인하였다. 성주 이씨[?~1791]는 19세에 혼인하여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그런데 이듬해 남편이 그만 병에 걸려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죽었다. 그 후 동서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죽는 날에 죽으면 저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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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효자. 본관은 성주(星州). 도금동(都今同)[?~?]은 어느 해 날씨가 무척이나 더운 여름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를 재워두고 아내와 함께 김을 매러 논으로 갔다. 그런데 집에 있던 병들고 늙은 아버지가 더운 날씨 탓인지 정신이 혼미하여 아기를 닭으로 잘못 알고 솥에 넣고 삶아버렸다. 먼저 집으로 돌아온 그의 아내는 아이를 찾다 솥에 넣어졌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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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역사. 의성 지역은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하여 청동기 시대에 삼한의 소국이 이곳에 성립되었다. 삼한의 소국 가운데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단밀면]·여담국(如湛國)[금성면 탑리리], 조문국[금성면] 등이 의성 지역에 존재하였다고 비정되고 있다. 185년(신라 벌휴이사금 2)에 조문국을 정벌한 신라는 조문군(召文郡)을 설치했다. 신라가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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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년(태조 12) 후백제 견훤의 의성 지역 공격이 있었다. 장군 홍술이 있는 의성은 결국 패배하고 홍술은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왕건은 애통한 심정으로 ‘나의 좌우수(左右手)를 잃었다’고 하였다. 후에 홍술은 의성의 성황신으로 모셔졌으며, 의성은 의성부로 승격하였다. 신라 말 고려 초의 후삼국 정립기(後三國 鼎立期)에 의성 지역이 지닌 지리적 중요성과 왕건과 의성 지역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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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丹北面)에 있었던 삼한 시대의 저수지. 대제지는 우리나라 수리 관개 농업의 초기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저수지로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에 위치하였다.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청동기 시대에 그 기원이 밝혀지고 있으나, 커다란 저수지를 축조하는 데 노동력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발전은 초기 국가들이 등장하는 때와 맞물리는 기원 전후한 시기에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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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음지리로 이주해 온 이이남의 아버지로서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충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승대(勝大), 호는 의제(義齊). 이집(李諿)의 7세손이 된다. 이승창(李承昌)[1588~1637]은 정온(鄭蘊)의 문인으로, 1617년(광해군 9) 사마시에 급제하고, 1632년(인조 10)에 장릉 참봉(章陵 參奉)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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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출신의 권상두가 포함된 유림 세력이 1919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조선의 독립 승인 청구권을 제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 1919년 3·1 운동 이후 유림 세력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중 유림이 빠져 있다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질서를 다루는 목적으로 개최된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조선 유림이 대표가 되어 ‘조선 독립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