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통한의 눈물, 그 속에 어린 의성부 그리고 장군 홍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004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류영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922년 - 진보성주 홍술 고려 귀부
특기 사항 시기/일시 924년 - 후백제가 대야성(합천)과 문소성(의성)의 군사로 조물성 공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929년 - 후백제가 의성 공격, 홍술 전사

[개설]

929년(태조 12) 후백제 견훤의 의성 지역 공격이 있었다. 장군 홍술이 있는 의성은 결국 패배하고 홍술은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왕건은 애통한 심정으로 ‘나의 좌우수(左右手)를 잃었다’고 하였다. 후에 홍술은 의성의 성황신으로 모셔졌으며, 의성은 의성부로 승격하였다. 신라 말 고려 초의 후삼국 정립기(後三國 鼎立期)에 의성 지역이 지닌 지리적 중요성과 왕건과 의성 지역민이 홍술에게 보내는 무한 신뢰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결과이다.

[후삼국 정립기 의성에 부는 바람]

의성은 지리적으로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북쪽으로 진행하거나, 고려 수도인 개성 방면에서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 지역으로 남진하더라도 꼭 거쳐야 할 교통의 요지이다. 따라서 후삼국 정립기에 경상도에서 펼쳐진 고려와 후백제 간의 패권 싸움은 의성 지역을 중심으로 치열히 전개되었다.

후삼국정립기에 고령~대구~군위~의성으로 이어지는 경상북도 지역의 중앙로는 일정기간 후백제의 활동로 내지는 세력권이었다. 그 근거로서는 첫째, 견훤의 후백제군이 경상도의 각 지역에서 활발한 군사 활동을 하였는데, 세력 기반을 전라도 지역에 두고 있는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군사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경상도 지역의 교두보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전제이다.

둘째, 927년 후백제가 경주를 함락시킬 때, 서쪽의 상주를 공략하고 곧 동쪽 방면의 영천 및 경주를 공략하였다는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후백제의 경상도 지역에서의 군사 활동이 대체로 합천, 고령, 대구로 연결되는 선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양 방면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후백제가 924년에 대야성(大耶城)[현 합천 지역]과 문소성(聞韶城)[현 의성 지역]의 군사로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견훤열전의 기록이다. 여기서의 문소성은 지금의 의성 지역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는 후백제가 의성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넷째, 역사 자료에 왕건에 귀부한 호족 세력은 나타나고 있으나, 견훤에 귀부한 호족 세력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경상도 지역의 경우 성주, 상주, 문경 등의 서쪽 방면과 진보, 영천 등의 동쪽 방면 및 안동 이북 지역에서는 고려에 귀부한 예들이 나타나고 있으나, 고령, 대구, 군위, 의성 지역으로 이어지는 중앙 지역에서는 그러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이 호족의 존재에 대한 흔적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결국 이들 지역이 일정 기간 후백제의 세력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 중심의 역사 서술 체제하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으로 여긴다.

이처럼 의성이 후백제의 세력권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 나오는 924년(동광(同光) 2) 가을 7월에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어 대야성·문소성의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합천과 의성 지역은 물론 그 사이에 위치한 고령, 대구, 군위 지역으로 이어지는 지역을 후백제가 확보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의 태조 12년 7월 의성 전투에 대한 기록에서는 후백제가 의성을 침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924년에서 929년에 이르는 어느 시점에서 의성 지역이 고려의 지지세력 내지는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의성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과 아울러 이 지역의 향배가 결국 후삼국의 정국 운영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증이 될 것이다. 즉 의성 지역은 후삼국의 쟁패 과정에서 늘 군사력이 충돌하던 자리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왕건의 통곡-의성, 후백제에 함락되다]

의성 전투 에 관한 기본 역사 자료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의 견훤조, 『고려사』 세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삼국 시기를 연구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역사책 모두에 의성 전투가 기록되고 있다는 것은 곧 이 의성 전투가 지닌 의미의 중요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들이 ‘견훤의성부를 공격하였는데 장군 홍술이 전사하였다’는 정도로 지나치게 소략하여 당시 의성 전투의 세밀한 상황을 재구성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견훤이 동원한 병력이 ‘갑졸(甲卒) 5천’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홍술의 전사에 대해서 왕건이 “나의 좌우수를 잃었다”고 애통해 하는 표현을 남김으로서 의성의 지리적 중요성과 홍술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느끼게 하는 정도의 부가적 서술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후대 자료에서 그 편린을 챙겨볼 수밖에 없는데, 우선 조선 후기에 세워진 홍술의 순절비인 ‘고려 김장군 순절비(高麗 金將軍 殉節碑)’를 지은 김이곤(金履坤)[1712~1774]은 비문에서 의성현의 구성산(九成山)이 둔산(屯山)으로 그 산 아래서 홍술이 전사하였다는 고을 선비의 얘기를 적고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는 구성산이나 둔산이란 표현이 보이지 않으며,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의성읍지(義城邑誌)』에 둔덕산(屯德山)이란 표현이 있는데, 이 산은 현재 의성읍상리리중리리를 남북으로 접하고 있는 산이며, 산 남쪽 사당골에 홍술 장군의 사당과 순절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의성 군민들은 이곳을 의성 전투의 격전지이자 홍술의 순절지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의성읍지』에서는 ‘세전(世傳)’을 전제로 홍술의 용모가 태조와 닮아 대신 죽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는 의성 전투 2년 전인 927년 대구의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이 왕건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속전(俗傳)’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이 사실에 대해 ‘순절비문’에 담긴 김이곤의 견해는 『고려사』에 왕이 군중에 있었다는 표현이 없어 왕건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의성읍지』의 표현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도 의성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의 충절에 감복하고 그를 위하여 사당을 세우기까지 하였음을 전제로 『고려사』는 전해들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니 고을 사람들의 기록인 『의성읍지』만 못하지 않는가라는 관점에서 왕건과 용모의 유사성을 홍술의 순절 원인으로 보는 『의성읍지』의 기록을 신뢰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제 『고려사』에 나오는 왕건의 표현을 보기로 한다. ‘견훤이 갑졸 5천으로 의성부를 치니 성주 장군(城主 將軍) 홍술이 전사하였다. 왕이 통곡하여 말하기를 “나는 좌우수를 잃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마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그리고 각종 이 시기 금석문 자료를 보더라도 왕건이 통곡하였다는 기록은 의성 전투와 관련된 이 자료 외에는 없을 것이다.

왕건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패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성 전투홍술의 전사에 그토록 아픈 마음을 표현했을까? 다음에서 언급하겠지만, 우선 홍술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의성의 수비를 위해 왕건이 진보(眞寶) 지역에서 데려온 사람이다. 이는 의성의 지리적 중요성과 관련하여 홍술이 지닌 능력과 충성심에 대한 왕건의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에 다름 아니다.

[홍술은 누구?]

홍술이라는 이름이 사료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진보 성주(眞寶 城主)라는 직함을 가지고서였다. 즉 『고려사』의 태조 5년 11월 신사일 기록에 ‘진보 성주 홍술이 사자를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는데, 원윤(元尹) 왕유경(王儒卿)과 함필(含弼) 등을 보내어 이를 위무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다다 다카시[旗田巍], 윤희면(尹熙勉), 문경현(文暻鉉) 등 대부분 학자들은 의성부의 성주 장군 홍술과 본래 진보 성주로 있다가 922년에 고려에 귀부하였던 홍술을 동일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보 성주였던 홍술의성부의 성주 장군으로 변모하였다는 의미인데 그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홍술의성부로 옮아간 원인과 관련하여 이께우찌 히로시[池內宏]는 사료에 오류가 있으며 홍술이 처음부터 진보가 아닌 의성에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며, 하다다 다카시는 진보성이 견훤에 빼앗겼을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는 등 이러저러한 이견들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들은 고려 태조 왕건이 진보성보다 지리적으로 중요한 의성을 방비할 목적으로 이미 그에게 귀부해 온 홍술을 의성 지역으로 파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홍술의 전사 소식을 접한 왕건이 통곡을 하며 ‘나의 양손을 잃었다’고 한 표현으로 미루어 홍술왕건이 신뢰할 수 있었던 심복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의성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의 방비를 맡기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왕건의 애통해 함은 홍술이라는 인재의 상실과 더불어 의성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의 상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홍술, 의성의 성황신이 되다]

지금 성황사(城隍祠)는 폐사되어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의성읍지』에 실린 의성현 지도에 상천면과 남부면 사이의 야산에 있는 성황사의 모습이 남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성황사와 홍술과의 관계 설정과 관련하여 대체로 세 가지의 기록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의성현 사묘조에 ‘속전’임을 전제하면서 김홍술을 성황사에서 제사지내고 있다는 표현이며, 둘째는 김이곤(金履坤)이 저술한 「고려 김장군 순절비」에 나오는 내용으로 ‘처음에 장군의 사당을 성황신과 함께 제사하였는데 숙종 병술년(1706)에 고을 사람인 생원 김석겸(金錫兼) 등이 장군을 성황신과 함께 제사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 하여 마침내 나무로 신주(神主)를 만들고 조두(俎豆)로 제사하여 충렬사(忠烈祠)라고 써서 내걸었다.’라는 표현이며, 셋째는 『의성읍지』 사묘조에 인용된 유호인(兪好仁)이 지은 성황제 영송 신가(城隍祭 迎送 神歌)의 서(叙)에서 이야기하는 ‘속전에 대체로 성황신은 홍술이다’라는 표현이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의성읍지』에는 홍술을 성황신으로 모신 것으로 이해한 반면 김이석의 『고려 김장군 순절비』에는 성황신을 모신 ‘성황사’와 구분하여 홍술을 모신 사당을 ‘충렬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의성에 있던 기존의 성황신을 지역 주민들은 의성을 지키다 전사한 홍술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홍술은 사후에도 의성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지역 주민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각인되어 있었으며, 성황신으로 신격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전라도 곡성현 인물조의 신숭겸(申崇謙)과 전라도 순천 도호부 인물조의 김총(金摠), 경상도 양산군 사묘조의 김인훈(金忍訓)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 지방민의 마음이 반영된 자료의 예로서 『성주목 읍지』 인물조에 이능일(李能一)을 언급하면서 ‘고려 태조의 개국을 보좌하여 관직이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본명은 능(能)으로서 통일 삼한(統一 三韓)의 공이 있어 ‘일(一)’자(字)를 하사 받았다. 지금 성주의 사창은 곧 신정(神井)의 터이며, 주민들이 성황사에서 이능일을 향사하고 있다‘라고 하는 기록은 크게 참고가 될 것이다.

이처럼 비록 홍술은 전사하였지만 그의 죽음이 남긴 가치는 오랫동안 의성 주민의 마음속에 신격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의성 전투 후 정국의 향배는?]

결국 견훤의 침공을 받은 의성은 성주인 홍술과 지역 주민의 분전과 희생 속에 함락되고 말았으며, 견훤의 후백제군은 경상도 북부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즉 후백제는 한해 전인 928년 11월 오어곡(烏於谷)을 확보하여 추풍령로를 차단한 데 이어, 의성에서 풍산, 문경 지역을 공략하여 조령을 통한 고려의 남방진출로를 마저 차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고려의 경상도 진출로는 개경에서 천안~청주~보은~옥천으로 이어지는 추풍령로와 광주(廣州)~이천~음죽~연풍~문경으로 이어지는 조령로 및 이와 인접한 계립령로는 거의 차단이 되었으며, 동쪽으로 훨씬 우회하는 죽령로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후삼국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상도 지역으로의 진출 및 확보가 전제가 된다고 할 때, 특히 가은현 공격에 실패했던 후백제가 군사를 돌려 고창군[안동 지역]을 포위함에 이르러서는 죽령로 마저 후백제에 의해 차단될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이는 왕건이 고창군을 구하기 위해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의논할 때,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태조의 질문에 대상(大相) 공훤(公萱)홍유(洪儒)가 대답하기를 ‘만약 이기지 못하면 마땅히 샛길로 갈 것이요, 죽령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러한 정세는 왕건이 직접 정예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고창 전투의 발생 배경이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의성부가 되다]

『고려사』 지리지의 의성부조에 전하기를 ‘의성현은 본래 조문국[召文國]으로 신라가 이를 취하였다. 경덕왕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의성부로 승격하였다’고 하여 의성이 의성부가 된 시기에 대해서 ‘고려 초’라고만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 초에 부로 승격한 경우들 즉, 성주 지역의 경산부, 천안 지역의 천안부, 영천 지역의 고울부, 울산 지역의 흥려부, 진보 지역의 보성부, 안동 지역의 안동부가 있는데, 이 중 부로의 승격 시기가 밝혀진 경우는 930년(태조 13)의 안동부와 천안부 밖에 없으며, 나머지 부들은 대부분 ‘고려 초’에 승격하였다고 하고 있을 뿐이다. 비록 부의 성립 연대를 명확히 하지는 않았지만 부가 성립된 곳은 행정적·군사적 측면에서의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그 지역의 지역 주민과 호족의 고려에 대한 기여도가 그 성립 근거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의성부의 성립 또한 경상도 지역에서 차지하는 지리적·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더불어 고려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후백제 견훤을 맞아 고군분투한 홍술과 의성 지역 주민들의 충성이 나은 결과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