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2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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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希立 |
영어음역 | Song Huirip |
이칭/별칭 | 신중(信中),삼규당(三規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신중(信中), 호는 삼규당(三規堂). 송희립은 현감을 지낸 송관(宋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은 송대립(宋大立)이요, 아우는 송정립(宋正立)이다. 고흥의 여산(礪山)송씨 가문은 세종·문종·단종의 세 임금을 섬겨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른 충강공(忠剛公) 송간(宋侃)이 계유사화 후 고흥으로 내려와 숨어 살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송희립은 송간의 6대손이다.
[활동사항]
송희립은 1553년(명종 8)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도만호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직속군관이 되어 여수 지역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때까지는 나대용, 정걸 장군 등과 함께 거북선 건조와 수군 교육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송희립은 형제들과 함께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핵심참모로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발휘하여 옥포해전, 당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에서 차례로 대승을 거두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는데, 이때도 송희립은 정탁, 정경달 등과 함께 조정에 간곡하게 상소하여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 복귀에 일조하였다.
1598년(선조 31) 11월 18일 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묘도 앞바다에서 송희립 장군은 중상을 당하여 기절하고,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선상의 병사들이 매우 놀라며 이순신 장군이 총탄에 맞았다고 말하자 기절했던 송희립이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영장(令將) 몇 사람으로 하여금 이순신 장군의 아들과 조카 등의 입을 막아 울음을 그치게 하고는 시신을 싸서 초둔(草芚)으로 덮은 후에 이순신 장군을 대신하여 갑옷을 입고 기와 북채를 들고 독전(督戰)하여 수세에 몰렸던 명나라 진린 도독을 구하는 등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송희립은 이듬해 이 공훈을 인정받아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오르고, 1601년(선조 34)에 양산군수(梁山郡守)로 발탁되었다가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 등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4월 전라좌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여수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송희립이 전라좌수사로 임명이 된 때에는 그래도 난리가 멈추었고,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은 뒤였다. 1612년(광해군 4) 6월 이립(李笠)에게 전라좌수사 자리를 넘겨주었으며, 1619년 별장을 거쳤다는 기록이 있을 뿐 이후에 대한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상훈과 추모]
송희립은 사후에 흥양(興陽)[현 전라남도 고흥]의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서동사와 충무사, 무광사 등에서 송희립을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