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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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영어의미역 | Peasant Uprising of 1894 |
이칭/별칭 | 동학농민혁명,동학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송은일 |
[정의]
1894년(고종 31)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운동.
[개설]
동학은 심화되고 있던 봉건 체제의 모순과 열강의 침략 위기 속에서 1860년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시되었다. 동학은 인내천 사상을 내세웠으며, 유·불·선은 물론 민간 신앙과 천주교를 포용한 당시 사회사상의 합성체로 평민은 물론이고 천민에 이르기까지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동학의 교리에는 개벽과 평등의 반봉건 사상과 서학에 반대하고 척왜양을 주장하는 반외세 사상이 내포되어 있었다. 때문에 위정자들은 동학을 사교로 지목하고 1863년(철종 14) 교조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하였으며, 이어 동학도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동학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노력으로 농민 대중 속에 광범위하게 침투하여 그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였다. 그리하여 지방 분산적이고, 일시적인 농민 대중의 저항을 결집시켜 전국적인 운동으로 성숙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확대 조직화된 동학에 가담한 농민들이 대규모적인 군사 행동을 일으킨 것은 1894년(고종 31)의 일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횡포와 착취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동학교인 전봉준(全琫準)의 지휘 아래 고부군청을 점령하고, 이 여세를 몰아 경상도를 비롯한 삼남 지방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동학농민군은 그 여세가 꺾여 무력해지고 이듬해 4월 전봉준 이하 동학지도자들이 처형을 당하면서 이 운동은 끝이 났다.
[역사적 배경]
여수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순천에 설치된 영호도회소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순천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5월 7일 전주화약이 체결되어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해 각자 지역 활동에 들어가자 전라북도 금구 출신 김인배의 지도하에 순창을 경유하여 순천 지역으로 돌아왔다.
김인배는 총령관 김개남을 지지하는 인물로서 전라좌도의 핵심적인 농민 지도자로 추측된다. 따라서 김인배는 좌도의 남쪽 요충지인 순천부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받고 순천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순천 지역 동학농민군들은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하였다.
영호도회소는 전라남도 지역 동학농민군의 구심점으로서 이 지역의 통치권을 장악한 상태로 폐정개혁 활동을 주도하고, 전주도회소나 남원의 도회소로부터의 지시 사항을 각 군·현의 농민군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즈음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할 조짐이 보이자 조선을 완전한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속셈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개화파 정권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런 상황 하에서 8월 19일 남원의 동학농민군은 남원읍성과 교룡산성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8월 20일에는 동학농민군의 총령관이었던 김개남이 남원으로 들어와 25일경 동학농민군대회가 열릴 것임을 각지에 알렸다. 동학농민군대회가 개최된 자리에서 농민군들은 더 이상 정부 측과 전봉준의 요구대로 치안 유지에 협력할 수 없으며 일본의 만행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결의를 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 수개월간 유지되어 온 정부와의 화해 국면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각지의 동학농민군들은 곳곳에서 읍내를 무력 점거하고 무기를 빼앗는 등 급격히 재봉기의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순천의 영호도회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김개남과 투쟁노선을 같이 하던 영호도회소 대접주인 김인배와 영호도회소는 8월 말부터 그동안 자제해 오던 방침을 바꿔 본격적인 무력 진출을 기도하였다. 김인배는 원래의 궁극적인 목표대로 수접주 유하덕과 함께 직접 동학농민군 주력 부대를 이끌고 하동·진주 방면으로 출전하였다. 이 지역을 장악해야만 전라도 지역에 대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미리 차단할 수 있으리라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영호도회소 주력 부대가 광양을 거쳐 하동 방면으로 출전한 상태에서 나머지 농민군은 영호도회소의 본거지와 그 후방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순천에 잔류한 동학농민군은 평소 그들에게 비우호적이었으며, 만에 하나 자신들의 뒤에서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 낙안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영호도회소의 후방은 다소 안전하게 되었으나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 군대는 동학농민군에게 있어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항상적인 충돌을 예비하고 있었다.
[발단]
전라좌수영은 동학교인이나 농민군의 활동이 두드러진 곳은 아니었다. 당시 전라좌수사 이봉호는 동학교인에 대해 호의적이어서인지 그 부하 중에서도 상당수가 동조했던 것 같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이봉호는 곧바로 면직되고, 1894년 7월 3일 그 후임으로 김철규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다.
김철규가 부임할 당시 그는 동학농민군에게 봉변을 당했는데, 그러한 소식이 전봉준에게 알려지자 집강소의 성찰들로 하여금 호위하게 함으로 김철규는 여수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철규는 부임하자마자 군교들과 동학농민군에 대한 방어책을 숙의하면서 동학농민군의 토벌을 구상하였고, 전라좌수영의 전력을 대폭 증강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김철규는 전라좌수영 안의 군인들과 주민들을 결속시켜 농민군의 체포와 탄압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전라좌수영의 동학농민군 세력은 급격히 감소한 것으로 추측된다. 뿐만 아니라 김철규는 서울 사람 이풍영으로 하여금 일본군 수백 명을 끌어 들여 전라좌수영 바깥에 주둔시켜 주민들의 동요를 차단하였다. 이와 같은 전라좌수사 김철규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강경 대응과 시시각각 불리해진 동학농민군은 그들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좌수영을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과]
1894년 음력 9월경 여수 쌍봉면 출신의 박군하와 윤경삼이 영호도회소의 동학농민군과 더불어 전라좌수영 남문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전라좌수영의 철저한 방비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영호도회소는 전라좌수영에 대한 공격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영호도회소의 주력 부대가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진출한 상황에서 전라좌수영을 섣불리 공격하다가는 동학농민군의 희생이 많으리라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진출을 기도했던 김인배가 이끄는 영호도회소 주력 부대는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부대와 몇 번의 접전 끝에 전술의 부재와 무기의 열세로 말미암아 크게 패하였다. 김인배는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 거점을 확보한 뒤 부산까지 진격하여 일본 세력을 완전히 쫓아낼 계획이었으나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김인배가 이끄는 영호도회소 주력 부대는 순천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일본군과 관군은 우금치와 청주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의 농민군을 대파하고 파죽지세로 전라도를 향해 남진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불리해진 농민군의 전황에 따라 영호도회소는 일본군과 관군에 대비해야 했으며, 농민군의 활로를 뚫을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었다. 사방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포위망을 조이자 김인배는 12월 초순 전라 좌도 지역에서 활동 중인 여러 접주들과 협의하여 전라좌수영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그는 여수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전라좌수영을 확보하여 지구전을 벌이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다를 통해 남해의 수많은 섬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음력 11월 10일,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는 수만 명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으로 향하였다. 드디어 순천 영호도회소를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전라좌수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 4만여 명은 현 여수시 소라면에 위치한 덕양역(德陽驛)에 이르러 전라좌수영의 정찰병을 물리치고 전라좌수영의 뒷산인 종고산(鍾鼓山)으로 나아가 웅거한 채 전라좌수영성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성의 공격이 여의치 않자 3일간 머물다가 일단 순천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12일), 전열을 정비한 김인배는 낙안 출신 이수희를 중군장으로 삼아 재차 전라좌수영 공격에 나섰다. 이때에는 쌍봉면 출신 박군하·윤경삼과 돌산읍 출신 황종래 등이 전라좌수영 공격을 선도하였다. 전라좌수영은 동학농민군에 대비하여 성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에 맞서 동학농민군은 야간 공격을 단행하였으나,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덕양역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며칠 간 전황은 소강 상태에 있다가 마침내 전라좌수영의 관군은 음력 11월 20일 덕양역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기습했다. 그러나 전라좌수영 군대는 여수에서 급히 달려온 나머지 지쳐 있었고, 날씨도 몹시 춥고 어두워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힘을 얻어 흩어지는 관군을 전라좌수영까지 추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라좌수영 군대는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전라좌수영에 도착한 동학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전라좌수영을 함락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전라좌수영을 포위한 동학농민군과 성내에 고립된 관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상황은 점점 전라좌수영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전라좌수사 김철규는 11월 25일 여수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일본 쓰쿠바[筑波] 군함에 비밀 서찰을 보내 구원 요청을 하였다.
[결과]
1894년 11월 28일 일본 쓰쿠바 군함은 전라좌수영에 전투 부대를 파견하여 전라좌수사 김철규를 도와 동학농민군을 추격, 덕양리에서 농민군을 격퇴하였다. 그 결과 동학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순천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영호도회소 농민군은 1895년 1월까지 여러 차례 전라좌수영군과 소규모의 전투를 벌였으나,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순천으로 물러난 영호도회소는 반농민군, 이른바 수성군에 의해 기습을 당하면서 광양으로 도주했으나 그곳에서 마찬가지로 수성군의 공격을 받아 김인배 이하 약 200여 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영호도회소의 주력 부대가 모두 붕괴된 것이다. 이후 순천·광양 등지에서 농민군과 관군·일본군과의 교전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대부분 농민군이 패하였고, 그들은 처참하게 살륙당하였다. 김철규는 여수·광양·순천·낙안·보성 등지에 전라좌수영 관군을 파견하여 철저한 농민군 색출 작업을 진행하여 농민군을 처벌하였다.
[의의와 평가]
1894년 관리들의 탐학이 갈수록 심화되고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영호도회소와 여수 지역 동학농민군은 척왜와 제폭구민(除暴救民), 그리고 보국안민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비록 동학농민군의 전라좌수영 공격과 그들이 추구했던 목적은 좌절되었지만 그들이 지향한 민족의식과 평등사상, 부정과 불의에 맞선 저항정신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