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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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國人追放運動 |
영어의미역 | Wan-paoshan Incid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병호 |
성격 | 한·중 민족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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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31년 7월 2일 |
발생(시작)장소 | 만주 |
관련인물/단체 | 여도현 등 |
[정의]
1931년 중국 만보산사건을 계기로 전라남도 여수에서 발생한 중국인 추방운동.
[개설]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에서 발생한 만보산 사건이 국내의 일부 신문에 의해, 만주의 우리 동포들이 중국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습격당했다고 전해졌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중국인들을 박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여수에서도 중국인 추방 운동이 벌어졌다.
[역사적 배경]
일제는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만주로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의 농토 침탈로 땅을 잃은 대다수 한인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일제는 한국 농민의 만주 이주를 일본인 이주의 전위로서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렇듯 재만 한인이 일제의 대륙 침략정책에 이용되면서, 재만 한인을 둘러싼 중·일 양국의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발단]
일본은 중국인 하오융더[郝永德]를 매수하고 자금을 투자하여, 만주에 장춘도전공사(長春稻田公司)를 설립하고 그를 지배인으로 앉혔다. 1931년 4월 16일 하오융더는 만보산 지방에 있는 소한림(蕭翰林) 등 11인의 소유 토지 가운데 미개간지 약 200ha를 해당 지주와 10년 기한으로 조차 계약하였다(단, 이 계약에는 현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무효라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4월 중에 하오융더는 현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지 않고, 이 토지를 조선 농민 이승훈(李昇薰) 등 8인에게 10년간 조차계약을 체결하여 주었다. 이승훈은 계약에 따라 조선 농민 180여 명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개척에 착수하여 관개수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부근 토착 중국 농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으므로, 이 일을 당국에 고발하는 한편 공사장에 집단 난입하여 공사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공사를 진행시키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 사실을 『조선일보』가 한국 농민이 중국인들에 의해 습격당했다는 내용으로 대서특필하여 보도하자, 전국 각지에서 중국인 박해 사건으로 발전·확대되었다.
[경과]
전라남도 여수시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의 관계자인 여도현·여운종 등을 비롯하여 김용환·주원식·박채영·김현수 등 애국청년들이 분격한 나머지 여수시 중앙동(당시 중정)에 있던 중국인 비단집을 찾아다니며 중국인 추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한때 여수 지역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이 철시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문제는 한국 농민 대 중국 농민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일본 대 중국의 국제 문제로 확대되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중국인 인권 보호를 내세워 중국인 복장으로 가장하여 중국인이 경영하는 고의기(高義基) 우동집에 몰래 숨어들어 한국 청년 관계자들의 신원을 파악, 검속하기에 이르렀다.
[결과]
만보산 사건의 여파가 여수뿐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로 확산되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각 신문사에서 진상 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사건의 이면에는 중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일본의 침략 음모가 잠재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일본의 모략적 선전이 전파(電波)로 침소봉대했다는 점이 밝혀져, 이 사건은 결국 한·중 두 민족의 이간을 꾀하는 일본의 대륙 침략의 출발점이었음이 확인되면서 여수 지역의 중국인 박해도 중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