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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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大用 |
영어의미역 | Na Daey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개설]
나대용은 전라좌수군절도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왜적 침입에 대비하여 병선 제작을 구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종제인 나치용과 함께 고향인 순천에서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 지역으로 내려왔다. 나대용은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전라좌수영 수군의 전선을 건조하는 감조군관으로 임명을 받고 선소에서 전선을 제작하게 된다.
선소는 전라좌수영 본영 선소일 것으로 추정한다. 장생포 선소는 당시 순천부 선소였고, 군내리 선소는 방답진 선소였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직접 지휘하기 쉬운 본영 선소[현재 여수 진남관 앞으로 매립된 상태이다.]에서 거북선을 제작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이순신 장군이 1592년(선조 25) 3월 27일 소포[종포 지역]의 거북선에 올라 대포 쏘는 연습을 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나대용과 거북선의 인연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나대용은 1년여 동안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과 함께 거북선을 제작하였다.
[가계]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
[활동사항]
나대용은 1556년(명종 11) 7월 25일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에서 태어났다. 나대용은 1583년(선조 16)에 28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있다가, 32세 때인 1587년(선조 20)에 사직하고 고향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후, 나대용은 자신이 거쳐 하는 방 바람벽에다 거북선의 설계도를 수없이 그려 붙여 가며 거북선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낮에는 산에 올라가 재목을 베어 왔고, 밤에는 거북선 모형을 제작하는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나대용은 1591년(선조 24)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막하 군관으로 들어가게 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대용은 발포만호진의 군관이 되었고, 거북선을 타고 당포해전에 처음 출전하여 왜군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등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대승을 거두는데 항상 앞장을 섰다.
옥포해전에서는 유군장(遊軍將)을 맡아 적선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적의 유탄을 맞았으나 자신이 직접 칼끝으로 살에 박힌 탄환을 뽑아내며 분전했다고 한다. 부상을 당하고서도 사천해전과 한산도해전에 참가했고,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서는 삼도 수군이 대승을 거두는데 크게 일조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나대용을 장하게 여겨 조정에 아뢰기를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니 나대용의 공이 가장 으뜸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594년(선조 27)에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이 인정되어 강진(康津)현감으로 임명되고, 이후 금구(金溝)·능성(綾城)·고성(固城) 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남해(南海)현령에 제수되어 성능이 우수하고 쾌속선인 해추선(海鰍船)을 만들기도 했다. 이듬해인 1611년(광해군 3)에는 경기도 수군을 관장하는 교동수사(喬桐水使)에 제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입은 부상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1612년(광해군 4) 1월 29일 향년 57세로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나대용은 전공이 혁혁하고 파란이 많은 조선 중기의 수군장이며,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조선 기술자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