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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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興立 |
영어음역 | Bae Heungrip |
이칭/별칭 | 백기(伯起),동포(東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백기(伯起), 호는 동포(東圃). 대사간 배규(裵規), 좌사간 배한(裵閑), 판서 배진손(裵晉孫) 등의 조상을 가진 이름 있는 가문 출신이었으며, 아버지 배인범(裵仁範)은 영산현감을 지냈다.
[활동사항]
배흥립은 1546년(명종 1) 전라북도 정읍의 고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던 배흥립은 약관의 나이에 음직으로 감역을 제수 받아 공직의 길을 걷다가 1572년(선조 5) 26세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으로 주부(主簿)를 역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로 들어서게 된다.
1583년(선조 16)에는 여진족의 두목 니탕개(尼蕩介)가 일으킨 난을 정언신(鄭彦信)과 함께 적진 깊숙이 들어가 소탕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 뒤 결성현감 등 외직을 거쳤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장흥부사로 있었다. 장흥부사로 재직 시 사헌부의 파직 상소로 며칠 동안 자리를 물러나 있다가 곧바로 흥양현감으로 복귀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조방장겸방어사(助防將兼防禦使)를 겸직하며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였다. 배흥립은 이순신 장군의 명을 받고 전함을 만드는 일에도 공을 들이는데, 그것이 거북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원균(元均)이 이순신의 아들이라 말할 정도로 각별하게 이순신 장군을 보좌한 배흥립은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등의 해전에 전부장(前部將)으로 참전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당포해전에서도 큰 승리를 거두고, 한산해전에서도 병졸들의 선봉에 서서 9전 9승의 전과를 올렸으며, 이에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는다. 1597년(선조 30)에는 이순신 장군의 후임으로 통제사에 오른 원균을 따라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 출전하여 중상을 입고서도 끝까지 싸움에 임하였다.
임진왜란 후 1600년(선조 33) 경상우수사가 되었다가, 그 이듬해인 1601년(선조 34) 5월 3일 전라좌수사에 올라 여수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3년 뒤인 1604년(선조 37)에 공조참판,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충청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1607년(선조 40)에는 총관(摠管)으로서 영흥대도호부에 나갔다가 이듬해 1608년(선조 41)에 병을 얻어 서울로 돌아와 있다가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배흥립이 세상을 뜨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어 장례를 치르게 하고 선무원종공신에 녹훈하였다. 인조 때에는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다시 더하여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효숙(孝肅)이다.